어디까지 인가

by 정오의 햇빛

나는 한때, 삶은 몸과 역할, 해야 할 일과 결과로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칠십 정도면 충분하고, 육십오 정도면 딱 맞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내 삶의 기준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나는, 누가 읽든, 세상에 남기든 상관없이, 내 의식이 다 탐험할 때까지 살아가고 싶다.


예전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칠십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육십오 정도면 딱 좋겠다.”
그때는 단순했다. 오래 살고 싶다거나, 무언가 이루고 싶다는 욕망도 없었다.
그저 몸과 역할, 해야 할 일과 결과가 삶을 결정하던 시절이었다.
살아 있음의 의미는 그 한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그런데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글을 다 쓸 때까지 살고 싶다.”

중요한 건, 누가 읽어주든, 인류에 기여하든, 그것이 내 삶의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삶의 목표로 삼을 만큼의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


글쓰기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사유의 운동이 되었다.
살아 있음의 증거가 아니라, 살아 있음 그 자체의 형식이 된 것이다.

과거에는 몸과 역할, 행위와 결과로 살아왔지만 지금은 인식과 사고, 사유로 살아가는 때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유가 다 끝나면, 몸도 잠들고, 사유도 잠들고, 호흡만 남는 삶이 올 것이다.


요양병원의 침대에서 콧줄을 끼고, 요관을 심고, 숨 쉬는 사람들의 삶일 수도 있겠다.

많은 사람들이 늙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는 몸이 약해져서가 아니라, 의식이 더 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는 지금, 의식이 자기 자신을 끝까지 따라가 보고 싶어 한다.
아직 붙잡을 게 남아 있는 한,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보다 네다섯 배를 하며 나를 증명하려 했던 과거의 습관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 사유를 끝까지 따라가면 무엇이 있으려나, 꼭 보고 싶다.


아마도 탄생의 순간을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보지 못한 것들. 내가 태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모르는 나.
태어나는 순간의 그들은 어떤 상태였을까? 보지 않아도 추측은 되지만, 사실은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는 순간 나를 반기는 사람들을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참나…
인간의 허망한 욕망을 다시 본다.
지금 그걸 봐서 뭘 어쩌겠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하지만 할 일도 없으니, 그거라도 붙잡고 살아볼 일이다.

삶의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삶을 유지시키는 차원이 바뀌었다.
이제 나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의식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살아간다.

그 사유의 길은 생각보다 오래, 아주 오래 나를 살아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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