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인가

말하기 인가

by 정오의 햇빛

유튜브를 보면 아주 감동적인 문장을 읽어주는 영상들이 있다.
목소리는 아름답고 발음은 정확하며 속도도 적당하다.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잘 다듬어진 목소리로
책의 문장들이 흘러나온다. 듣는 동안 나는 분명히 감동한다.

아름다움에 취하고, 말의 의미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상이 끝나고 나면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마치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돌아오는 것과 비슷하다.
분명 나쁜 시간을 보낸 건 아니고 전혀 변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유튜브는 보통 한 시간씩 이어진다.
설교보다 훨씬 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듣는다. 아니, 듣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그저 흘러가게 둔다.
어쩌면 그 콘텐츠는 사람을 변화시키기보다 그 자리에 붙들어 두는 데 더 능숙한지도 모른다.

나는 그 영상을 아주 열심히 듣다가 껐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말을 하는 게 듣는 것보다 나에게 더 유용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유용함 역시 근거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한 말은 기억할 수 있다.
어디까지 말했는지, 무슨 생각을 지나왔는지 좌표처럼 남아 있다.


반면, 듣는 행위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라도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가 없다.
그 말은 이미 완성되어 있고, 나는 그 안에 잠시 머물렀다 나올 뿐이다.

그래서 나는 불안해진다. 이 말들이 내 사유 위에 얹히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
스쳐 지나가 버릴 것 같다는 감각.


내가 기억하는 나의 말은 “여기까지”라는 선을 긋게 해 준다. 그리고 그 선 다음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만든다.

아마 지금의 나는 아름다운 문장을 더 듣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미완의 생각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그냥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오늘은 듣는 대신 말하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지금의 나에게는 조금 더 정확한 방향처럼 느껴진다.

내 생각은 아름답지도, 거룩하지도, 온전하지도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열고 지나가야 아름답고 거룩하고 온전한 생각에도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문 앞에서 계속 남의 정원만 엿보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잡초 무성한 나의 정원을 가꾸려면 정원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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