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브런치에도 있는
나는 삶 속에서 늘 ‘말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정보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의 생각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사람을.
그래서 책을 찾았다. 사람들은 책이 인생을 바꾼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으면서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감탄은 잠깐 스쳤고, 삶은 바뀌지 않았고, 존경심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멋진 생각이네”라는 말만 남고, 그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끝이었다.
이상했다.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좋다는 책이 나에게는 도달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책 속의 사람들에게는 ‘현장성’이 없었다는 것을. 그들의 말은 이미 정리된 자리에서, 이미 통과한 이후에 쓰인 말이었다. 그 문장에는 결론은 있었지만, 흔들림은 없었다. 사유가 아직 만들어지고 있는 상태, 모르는 채로 머뭇거리는 순간, 말이 막히는 침묵은 대부분 지워져 있었다.
나는 결과를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사유가 만들어지는 순간에 곁에 있어야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이건 어린아이의 배움과도 비슷하다. 아이는 누군가가 옆에 함께 있어 줄 때 성장한다. 아이의 속도로, 아이의 눈높이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경험 곁에 머물러 줄 때 아이는 비로소 자기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반대로 아직 겪지 않은 일에 대해 어른이 와서 설명만 해주면, 그 말은 필요한 정보일 수는 있어도 아이의 삶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아직 끌어다 쓸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책이 내게 그랬다. 설명은 충분했지만, 나는 이미 현장에 서 있었고, 책은 늘 사후 해설처럼 도착했다.
나는 기술도 책으로 배우지 않는다. 제품 설명서를 읽기보다 먼저 작동시킨다. 대부분의 설명서는 없어도 사용이 가능하다. 중요한 건 기계의 구조가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는 것이다.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전원을 켜고 끄는 법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어떤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느냐이다. 때로 대가를 과하게 치르는 적도 있다.
오래전에 좋은 차를 탔던 적이 있었다. 연료가 바닥나면 엔진을 열어야 된다는 것을 몰랐다. 연료는 완전히 바닥났고 차는 그 자리에 멈췄다. 견인을 해서 정비소에 갔고 엔진은 열리고 닫히는 비용으로 백만 원이 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여전히 설명서는 문제가 닥쳐야 열어보는 부수적인 물건으로 놓여있다.
나는 늘 삶을 먼저 사용해 왔다. 그리고 말은 늘 나중에 도착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을 깨지고 나서야 이해했다. “아, 이게 이런 거였구나”라는 말은 늘 상처 뒤에 왔다. 이건 너무 힘든 방식이었다. 책으로 미리 알 수 있었다면 훨씬 덜 아팠을 텐데, 왜 나는 늘 실전에서만 배웠을까.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안전한 자리에 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삶은 너무 일찍 실전이었고, 나는 대응해야 했고, 연습이라는 개념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책은 연습장이 아니라 뒤늦은 해설서가 되었다
말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나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한 끝에, 말하는 내가 되었다. 내가 한 말을 읽으며 내가 이런 말을 하는구나 하고 알아간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예순일곱이다.
해는 저절로 뜨고, 밥은 저절로 먹을 수 있고, 사람들이 없어도 더 이상 공허하지 않다. 가야 할 곳도 없고, 배워야 할 것도 없다. 더 나아질 필요도, 증명할 필요도 없다.
이 감각은 공백이 아니다. 결핍도 아니다. 더 이상 방어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배움이 생존이 아닌 선택이 되는 자리다.
이제 배움은 정보를 더 쌓는 일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들과 조용히 함께 살아보는 일이 되었다. 결론을 내리지 않고, 의미를 만들지 않고, 하루의 결을 그대로 통과해 보는 일.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드디어 자연이 되었다.
자연은 애써 완성되지 않는다. 성장하겠다고 다짐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때의 조건에 맞게 피고, 지고, 흐른다. 의미를 만들지 않아도 의미 속에 있고,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존재한다.
이제 나의 시간은 쓸모가 아니라, 존재의 밀도로 흘러간다.
여기 있는가? 아직 그대 거기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