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타년 타일

인식을 넘어서는 일은 대기권돌파와도 비슷한 일

by 정오의 햇빛

중력 벽을 건너는 일

어제 본 영화가 하룻밤을 자고 나자 전혀 다른 영화가 되어 있었다.

장면은 같고 인물도 같은데, 의미만 달라졌다.

마치 영화가 아니라 내 인식이 다른 자리로 이동한 것처럼.

영화 속에는 중력 벽이 있다.

그 벽을 기준으로 두 개의 구역이 나뉜다.

처음에는 그저 공간적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은 공간이 아니라 사유가 변하는 지점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의 내면에는 이쪽의 사유와 저쪽의 사유가 있다.

문제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인식의 수준, 인식의 방식, 인식 체계의 문제다.

체계는 설득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그 벽은 중력을 거슬러야만 넘을 수 있는 장벽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건 장년구역의 중력이다.

그곳의 중력은 오히려 약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발목에 무거운 쇠 족쇄를 차고 살아간다.

처음엔 자유를 억압하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건 인식을 제한하는 도구다.

관습, 사상, 철학, 교육, 역할. 사람을 묶어 두는 것들.

하지만 그것들이 없으면 사람은 떠오른다. 날아다니지만,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다.

자기 인식이 없어서다. 그래서 약한 중력의 세계에는 오히려 인공적인 무게가 필요하다.

반면 우일구역은 다르다.

족쇄 없이 질서가 유지된다. 평화롭고 조용하다.

그곳에는 외부 통제가 아니라 내부에 자리 잡은 인식의 무게가 있다.

스스로 균형을 이루는 세계다.

그래서 두 구역의 사람들은 서로 오갈 수는 있다.

장년구역의 사람도 우일구역에 잠시 다녀올 수 있고,

우일구역의 사람도 장년구역을 지나간다.

하지만 머무는 쪽은 다르다.

우일구역의 사람은 장년구역에 정착하지 않는다.

그 세계의 인식 밀도가 너무 거칠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일구역의 사람은 장년구역에 오래 머물 수 없다.

자기가 걸고 있는 인식의 고리가 너무 무거워서 장년구역에서는 발걸음 옮기기조차 힘들다.

그래서 장년구역으로 돌아온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이 영화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세계를 나눈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식이 작동하는 계층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는 그 벽을 넘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아직 이쪽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넘어갈 수 없는 구조 안에 있다고.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영화는 더 이상 SF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서 있는 인식의 자리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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