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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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의 햇빛

보시는 가능한가

불교 용어에 ‘보시’라는 말이 있다.
이유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본다.
기대 없이 준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아직 ‘나’가 있다는 뜻이다.
보답을 원하지 않더라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의미를 남기고 싶은 마음은 남는다.


정말 기대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번뇌가 소멸된 존재의 방식일 것이다.


이를테면 아라한.

그렇다면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아라한이 되고 싶다면
아라한의 행동을 흉내라도 내야 할까.

깨달아서가 아니라 깨닫기 위해서.

하지만 기대 없는 나눔은 여유가 있어서 베푸는 것과도 다르다.
흘러넘치는 것을 나누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주는 나’가 없는 상태에 가깝다.


그냥 흐르고 있을 뿐이다.

꽃이 향기를 보시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달이 달빛을 나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보시라기보다 그저 그러한 상태다.

어쩌면 보시는 깨달은 자의 삶이라기보다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방편인지도 모른다.


‘내 것’이라는 감각을 조금씩 느슨하게 만드는 연습.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깨닫기 위해 보시를 한다면 그것 또한 대가를 바라는 행위가 아닌가.

깨달음을 얻고 싶다는 마음이 이미 목적이라면 그것은 순수한 보시일 수 있을까.


나는 테니스 초보자에게 레슨을 해준다.
대가를 받지 않는다.
그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가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도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마음 한켠에는 고마워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말뿐 아니라 햄버거 하나쯤 사오면 더 좋겠다는 마음도 있다.


그는 말로는 고맙다고 한다. 정말 고마워한다. 하지만 말뿐이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굴뚝같은 마음이 올라온다.

바라는 마음이 없는 척하지만 사실은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보시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거래를 하고 있는 걸까.


보시는 아마 깨달은 자의 상태가 아니라 이 굴뚝같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영원히 깨닫지 않을 자신이 있다.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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