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너쉽은 없다.
공주와 나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공주는 나의 불만을 알 수 없고, 나도 공주의 불만을 알 방법이 없다.
그는 어쩌면 나의 어떤 점을 불쾌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공을 치고 있는 셈이다.
물어볼 수도 없다. 물어보면 그는 아마 “없다”고 할 것 같다.
솔직하지 않을 것 같고, 어쩌면 솔직할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지점에서 자주 멈춘다.
상대의 침묵 앞에서, 나의 추측만 점점 자라난다.
나는 여러 번 썼다.
“모르겠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 말을 반복하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오래, 이렇게 자주 모를 수 있나. 분명히 이유가 있을 텐데.
어느 아침, 갑자기 알게 되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공주가 싫다. 정말 싫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부르고, 나는 원치 않으면서도 끌려나간다.
그 이유를 모른다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몰라야한다.
설 명절에 당근 사러 나갔던 날이 떠오른다.
겉으로는 그냥 필요한 물건을 사러 나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알고 있었다.
그건 ‘그냥’ 나가는 게 아니었다.
명절의 쓸쓸함, 어딘가에 잠깐이라도 연결되고 싶은 마음,
사소한 거래라도 사람의 온기를 스치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정면으로 보고 싶지 않았다.
누가 그런 자신을 또렷이 마주하고 싶겠는가.
그래서 나는 늘 말했다.
그냥 나간 거라고.
별 뜻 없다고.
공주와의 테니스도 그랬다.
나는 불평을 하면서도 계속 나갔다.
그가 늦고, 자기중심적이고, 함께 공을 치면서도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말했다.
“왜 계속 치는지 모르겠다.”
지금 보니 그 말은 사실 이것과 같다.
살고 싶지 않은 남자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이 “왜 저 남자랑 사는지 모르겠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과.
모르는 게 아니다. 말하지 않는 것뿐이다.
우리는 종종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니다.
이유를 또렷이 보는 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도 함께 드러나기 때문에
그 문 앞에서 눈을 감는다.
나 역시 그랬다.
그가 나를 불러준다는 사실,
완전히 혼자 운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
이미 만들어진 관계를 버리고 다시 어색한 자리로 들어가야 하는 수고로움.
나는 그것들을 알고 있었다.
다만 정직하게 이름 붙이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도 나는 안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정확히 모른다.
아마 앞으로도 또렷이 알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해졌다.
나는 몰랐던 것이 아니다. 나는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관계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오래, 아주 오래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