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라도 대야 하는건가.
나는 무엇으로도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예전처럼 존재를 위협받는 느낌은 없다.
돌이켜보면 나를 가장 집요하게 위협하던 건 외부가 아니라 내 안의 초자아였다.
“너는 아니다.”
“너는 없다.”
“너는 틀렸다.”
그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살아 있기 위해서라도 계속 나를 증명해야 했다.
동의할 수 없었으니까.
지금은 그 목소리가 많이 약해졌다.
해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완전히 사라졌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있다.
예전처럼 나를 향해 “너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절대적인 판정관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요즘의 나는 사소하고 비정기적인 아르바이트가 생기면
조금 기대가 된다.
힘든 일이 아니어서이기도 하고, 하는 일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새로운 공간에 간다는 작은 여행의 감각이 있다.
낯선 공간 낯선 사물과의 만남.
몸을 움직일 수 있음이 즐거운 기대. 일이 놀이가 되었다.
그 정도면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히 좋은 사건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아마 이것일 것이다.
어떤 주제를 두고 깊이 토론하는 경험.
혹은 무언가를 끝까지 증명해 보는 경험.
수학 문제 하나를 끝까지 밀어붙여 풀어내는 것 같은 그 종류의 몰입.
생존이 아닌 생각이 살아 움직이는 자리.
어쩌면 나는 지금 증명에서 해방되었지만 증명욕구는 사라지지 않은거 아닐까.
아무도 확인 하지 않는 나의 존재 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