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브런치를 안하고 있으면 뭘 하고 있을까.
처음엔 젊은 남녀의 이야기처럼 보였다.
사랑하고, 헤어지고, 각자의 삶을 사는 이야기.
그런데 이 영화는 평면적으로 흐르지 않았다.
흑백과 컬러가 섞이고, 시점이 교차하고, 장면 사이사이에 공백이 있었다.
그 공백이 나를 바쁘게 했다.
이건 단순한 서사가 아니라 하나의 게임 같았다.
누군가 이미 선택해 놓은 루트를 나는 따라가며 해석하는 플레이어였다.
표면적으로는 연애다.
하지만 그 밑에는 결핍이 있다.
고아인 여자. 엄마를 잃은 남자.
여자에게 그는 ‘가정’이고, 남자에게 그녀는 ‘엄마’다.
이 관계는 연애이면서도 완전한 남녀 관계는 아니다.
애착의 복원이다.
아동기의 정서가 멈춰 있던 자리가 서로를 통해 재현된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현재의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많은 사랑은 과거의 욕망에서 출발한다.
말을 못 하던 시절, 부모 사이에 끼지 못했던 작은 아이의 욕망.
그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마음.
그 미해결의 흔적이 성인이 된 뒤에도 작동한다.
남자는 게임을 만든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한다.
“주인공이 어려움을 겪어야 재밌지 않겠어?”
그는 싫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죽음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저 삼켜야 했던 고통이었다.
어린 아이는 슬픔을 설명할 언어도 없이 꿀떡꿀떡 삼켜야 한다.
배 속은 이미 아픔으로 가득하다.
거기에 또 고통을 넣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의 게임은 고통이 빠진 채 멈춰 있었다.
그러나 여자가 떠난다.
엄마의 죽음과 달리 이 이별에는 그의 선택이 개입되어 있다.
열차를 타지 않은 것. 게임만 붙들고 있었던 것.
이건 ‘당한 고통’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결과의 고통’이다.
여기서 아동의 삶은 끝난다.
아동은 당한다. 청년은 책임진다.
이 고통은 피할 수 없다.
도망치면 퇴행이고, 감당하면 성장이다.
그는 결국 게임에 고통을 넣는다.
그건 단순한 서사 장치가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비로소 그는 소비자가 아니라 창작자가 된다.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가슴이 찢어진다.
“만약에 열차를 탔더라면?”
“만약에 계속 함께했다면?”
이 질문은 사랑의 질문이 아니라 하지못했던 선택의 질문이다.
계속 “어땠을까”를 반복하는 건 사실 과거를 찾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게 흑백이었다.
흑백은 미완의 질문이다.
색을 잃은 기억.
영화는 현실 서사로 끝내지 않는다.
게임으로 돌린다.
찾아낼 수도 있고,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찾으면 흑백이 컬러로 바뀐다.
삶은 한 번이지만 마음은 여러 번 플레이한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그들이 다시 이어져서가 아니라, 이제 꿈속에서도 서로를 찾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복원이 아니라 통합.
“그때는 그때였다.”
그 순간 시뮬레이션이 멈춘다.
성장은 고통을 이기는 게 아니다.
고통을 책임지는 것이다.
퇴행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때로는 아직 감당할 힘이 없어서 멈춰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안에는 모두 어린 아이가 있다.
놀고 싶어하고, 되돌리고 싶어하고, 상상하는 존재.
성숙은 그 아동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아동을 데리고 현재를 사는 것이다.
이 영화는 겉으로는 단순하다. 젊은 연인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구조는 복잡하다.
공백이 많고, 해석할 여지가 있고, 보편성과 개인성을 동시에 묻는다.
“요즘 애들만의 고통인가?” “아니면 인간의 통과의례인가?”
나는 그 질문을 따라가며 계속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재미있었다.
평면적인 영화는 졸린다.
하지만 구조가 열리는 순간, 나는 관객이 아니라 해석자가 된다.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과거를 반복할 것인가, 통합하고 현재로 올 것인가.
마지막 장면의 안정감은 그들의 안정이 아니라
어쩌면 내 안에서 멈춘 어떤 질문의 안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꿈속에서 찾지 않아도 될 때,
비로소 색이 돌아온다.
현실보다 과거가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
아름다움은 기억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펼쳐지는 장면아닐까?
선명한 삶을 바라보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