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라는 씨앗을 품고
우울이나 적적함, 홀로 있음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은 분명 효과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조금은 숨이 트이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그 방식에만 기대어 버티기에는 어딘가 너무 소모적이다. 마음이 허기질 때마다 사람을 찾아 나서는 일은, 때로는 그런 자신을 더 가엾게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 나는 다른 방향을 생각한다.
날마다 아주 작은 기대일지라도 희망을 품는 것. 어쩌면 그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누굴 만나 무엇을 하기로 했다는 기다림은 물론 구체적이고 분명한 힘이 있다. 달력에 적힌 약속 하나가 하루를 견디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매일 그런 약속으로 삶을 채울 수는 없다. 결국 비어 있는 날들이 더 많다.
그래서 문제는, 기대의 대상을 넓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일 해가 뜨는 것.
내일 비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내일 테니스를 칠 수 있다는 것.
내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내일이라는 하루가 다시 온다는 사실.
이처럼 타인이 개입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존재하는 장면들에 대해, 나는 얼마나 기대를 느끼고 있는가.
어쩌면 내가 키워야 할 것은 만남의 횟수가 아니라, 기대감의 감도인지도 모른다.
어떤 거창하고 적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삶의 아주 일상적인 장면에까지 마음이 미세하게 반응할 수 있다면 — 그 기대의 감도가 조금만 더 살아난다면 — 오늘 하루를 건너가는 힘은 생각보다 단단해질 것 같다.
가족이 있고, 매일 부딪히는 동료가 있고, 생활의 결이 촘촘히 짜여 있다면 아마 이런 생각은 굳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하루를 건너는 것만으로도 이미 삶은 충분히 버겁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개 너무 바빠서, 혹은 너무 엮여 있어서, 자신의 기대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까지는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른 자리에 서 있다.
내가 돌봐야 할 뚜렷한 대상도 없고, 정기적인 사교 활동도 하지 않는다. 종교 활동도, 직업 활동도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누군가와 부딪히며 하루의 윤곽이 저절로 잡히는 삶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나의 이십사 시간은 가끔 이렇게 느껴진다.
하늘에서 아무 예고 없이 툭 떨어진 보따리처럼.
누가 대신 풀어주지도 않고, 누가 대신 묶어주지도 않는다.
나는 매일 그 보따리를 혼자 풀고, 혼자 여미며 하루를 건너간다.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해오던 말일지도 모른다.
꿈을 가지라고. 설레이라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것이 내 몸에서 스스로 떠오른 깨달음으로 다가온 순간, 가슴이 설렜다.
마치 아주 기발한 방법을 혼자 찾아낸 사람처럼.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남이 건네준 정답보다, 내 몸에서 올라온 이해가 나를 더 멀리 데려간다는 느낌.
나는 지금, 그 방향을 조금 더 믿어보려고 한다.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하루를 잘 살아가려 계획하는 밤을 보낸다면 삶은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설레이는 축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