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을 수 있겠지
별 느낌이 없던 순간이, 이제는 달라졌다.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부위가 내 안에 생긴 느낌이다.
예전에는 사랑의 빗물이 닿지 않도록 우산을 썼다.
사랑이 내게 닿지 않도록, 스스로를 움츠리고, 막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우선을 치웠다.
빗물이든, 한밤눈이든, 휘몰아치는 바람이든 그 사랑이 내 안을 거쳐 지나가도록, 몸을 내어주는 느낌이다.
사랑을 해보지 않았거나 받아보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사랑이 내게 머물지 않도록 내가 움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는, 사랑 앞에 몸을 드러낼 수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랑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조그만 관심이라도, 나에게는 너무 필요한 시간이다.
과거에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았다.
바라보는 세상, 가야 하는 길,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것들로 시간은 가득 차, 나를 위한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판독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경험한다.
굳이 그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정의할 필요도 없다.
그저 허기진 내게 필요한 감각, 필요한 시간일 뿐이다.
삶을 지나온 흔적은 몸에 남는다.
그녀에게 남은 흔적은 ‘여유로움’인 듯하다.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자기 시간과 비용, 힘을 자기 자신에게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자신을 어디에 쏟았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내 삶을 아이를 양육하고, 나의 삶의 토대를 만들며, 자산을 형성하는 데 모든 것을 쏟아 넣었다.
한 톨도 남김없이.
그게 삶인 줄 알았다.
그 삶에서는 항상 빠르게 행동하고, 비교하고, 선택하고, 결론을 내려야 했다.
지금의 삶에 오기 위해 모든 시간을 밀어 넣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내 삶의 형태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위치한 현재의 좌표는 물질과 에너지와 시간과 시선을 응축해 만들어낸 결과값일 것이다. 어떤 삶이든.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은 삶의 절정인 순간이다.
흘러내린 꺾어진 시간이 아니라, 모든 에너지를 밀어올려 도달한 가장 예리한 지점.
그 지점에는 주변이 없다.
해야 할 일도, 돌봐야 할 대상도 없다.
마치 산 꼭대기에 오른 듯,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고 굳이 내려가지 않아도 되는, 머물러도 되는 순간이다.
그 꼭대기는 외롭고 쓸쓸하지만, 지나온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했던 일을 반복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즐거웠든, 힘들었든, 의미 있었든, 지금은 사람도 드물고 인가도 없으며
흘러가는 구름, 새소리, 계절로 피어나는 이슬, 꽃과 함께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시간을 보내는 때다.
그 속에서, 지내다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다.
지금 내 마음은, 돌아보지 않았던 시간과 다시 떠오르지 않았던 상대를 떠올리며 “아, 그때는 그랬구나” 하는 아련함을 느낀다.
이 아련함은 외로워서 생긴 것이 아니다.
내가 알아주어야, 내가 느껴주어야 하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어제, “나는 사랑을 몰라”라는 내 정의가 입 밖으로 나오면서 내 안에 쳐져 있던 차단막이 사라진것 같다.
그 막 뒤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이제 펼쳐져 보이는 느낌이다.
여기에는 외로움이나 고요함이 아니라 “어머, 그랬구나. 그랬었네” 하는 공감이 있다.
그 공감의 느낌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냥 마음속에서 조용히 번지는 습기같다.
어제, 나는 내 마음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면, 그 감정은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연기와 같았을 것이다.
머릿속에서는 뚜렷하게 느껴지는 감정과 생각이 있었지만, 말하지 않은 상태, 표현되지 않은 상태,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말을 입밖으로 뚜렷하게 문장으로 내미는 순간, 나는 그게 진실인지, 사실인지 스스로 검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검증의 단계일지도 모른다.
“이거는 뭐였지?”
“저거는 뭐였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뭔 거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말한 것에 내가 확증을 가지지 못하는 순간, 외부의 반박이나 설득 없이도 내부에서 말에 대한 재평가와 사실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시작된다.
아마도 나는,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들을 내 안에 이미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많은 자기 증거가, 그 말과 문장 속에 내포되어 있었다.
그 말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그 말을 만들어낸 저편의 것들이 지금 세상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꼭 정답이 아니다.
“그건 그렇지 않아. 너의 주장은 편향된 거야”라는 내부의 반론이 나타날 수도 있다.
결국, 말을 꺼내는 순간이 중요하다.
외부의 판단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이미 자기 내부에서 시작된 검증과 정의를 입 밖으로 내보내는 것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정정하자면 사랑받지 못하거나 사랑한적이 없다는 것은 나의 마음속의 생각이었을뿐 사실은 항시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나의 말을 들은 사람은, 내 말에 대해 평가도, 반박도, 위로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건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 말은 내 이야기다.
어떻게 상대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추측하면서 그 생각을 부정하거나 누그러뜨리겠다는 시도를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사람이었다면, 나는 애초에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문득 생각이 든다.
나는 남이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너무 쉽게 “이러저러 하다”라고 평가를 내리거나 부정하거나, 상대의 생각을 지우는 말을 했던 것 같다. 그건 참 좋지 않은 습관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사유가 거의 없고, 말초적이고 단편적인 이야기만 하면 참기가 힘들다.
그러니 내가 부정하거나 뛰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어제 했던 이야기 “사랑을 받거나 해본 적이 없어”라는 말도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그냥 듣고 넘어갈 수 없는 말일 수 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에게 그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사랑을 하지도, 받아보지도 않은 사람이 그렇게 존재하고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충격일 수도 있다.
나는 직관적이고 주도적이며, 삶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져가기 위해 힘을 쓰며 살아왔다.
그래서 내 말이나 생각에 대해 타인이 수정하거나 반박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과는 아예 상대하지 않았다.
그건 나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도 해보지 않은 네가, 많은 생각을 한 내 생각을 반박하다니” 하는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은 스스로 느끼고, 말로 표현하며, 내 안에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너무 늦게 그 문을 열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사랑을 주고 받은 적이 없다라는 나의 고백이 얼마나 왜곡된 나의 생각이었는지 알게 해준 열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