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자

서로의 세계속에 없는데 ...

by 정오의 햇빛

“저 사람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나를 존중하지 않는 느낌이야.”

우리는 관계 속에서 이런 말을 쉽게 꺼낸다.


그 말에는 늘 상대가 중심에 있다.
그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스친다.


어쩌면
그 사람에게는 아직 ‘나’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나는 이미 그 사람과 관계 안에 들어와 있다고 느끼지만
그의 세계에서는 나는 아직 등록되지 않은 존재일 수도 있다.


상대의 장부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 존중을 요구하고, 사랑을 기대하고, 서운함을 쏟아내는 일.

그건 마치 아직 이름조차 올라가지 않은 명단을 보며 “왜 나를 먼저 불러주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등록의 시기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나를 언제 인식할지, 혹은 끝내 인식하지 않을지, 그건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래서 어떤 관계는 끝내 깊어지지 않는다.

서로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사람으로 등록하지 않은 채’ 관계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에서는 감정보다 기능이 먼저 움직인다.


필요한 말을 주고받고,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그 정도의 거리에서 머문다.

키오스크와 대화하듯, 전자레인지를 다루듯,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기대를 줄이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 방식은 안전하다.

하지만 그 안전함 속에서는 어떤 따뜻함도 생겨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등록된다’는 건 사실 꽤 위험한 일이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존재가 되고, 그 사람의 태도 하나에 흔들릴 수 있게 되니까.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람이 되기를 멈추고 기능이 되기를 선택한다.

관계 안에 있으면서도 관계 밖에 머무르는 방식으로.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이상하리만큼 아무 일도 없는데 텅 빈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마 그건 누구에게도 등록되지 않은 채 오래 머물러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교회에 가면 교인 등록을 하지 않고 자주 보는 사람의 이름을 묻지 않고 안부도 궁금해하지 않고

어느 마트에도 고객등록을 하지 않는다. 포인트를 적립해준다는 고마운 제안도 반갑지 않다.

깨알같은 포인트보다 아무 마트나 드나드는게 더 편하다.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주는 허전함을 거부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주민센터에 독거노인으로 등록되어야 하는걸까?

그래서 가끔 누구라도 나의 안부를 물어오기를 기다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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