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란이 이야기
똘망똘망 큰 눈에 동그란 이마를 가진 목소리 고운 친구가 있었다. 열두살 그 아이의 이름은 란이.
똑같은 단복을 입고 두 손 마주잡고 뛰던 내짝.
우리반에서 유일하게 합창부 단원이었던 우리 둘은 그 해 떨어질레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고만고만한 키에 서로 마주보면 딱 눈높이가 같았던 란이와 나는 1교시 수업전부터 합창부연습 끝나던 오후까지 재잘재잘 이야기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나는 가수가 되고 싶다했고,
란이는 피아니스트 되고 싶다고 했었다.
그 토요일도 학교마치고 란이집에서 피아노를 치고 점심을 먹었고 머리가 아파 밥도 잘 못먹는 너를 두고 돌아설 때까지도.
나는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가 월요일에도 다시 볼줄 알았겠지. 그런데 월요일에 많이 아파 학교에 나오지 못했던 너는 화요일에도 보이질 않았다.
선생님이 나에게 니가 급성뇌종양에 걸렸고 주말에 큰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세상을 떠났다고 했을 때 나는 믿지 못했다.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담임선생님까지 나를 앞세워 너네집을 찾아갈 때 그 때 나는 분명히 알았다.
니가 죽고 없다, 이 세상에 없다. 다시 볼 수 없다.
선생님들이 번갈아가며 괜찮다며 내 어깨를 두드렸고 네 엄마와 할머니는 나를 붙들고 펑펑 우셨다.
나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소리내어 울지 않았다. 그래야 할것만 같아 아랫입술을 깨물듯 꾹 닫았던것 같다.
그리고 처음 알았지.
늘 곁에 있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얼마나 슬픈지 몸이 왜 말을 듣지 않는지. 온몸에 힘이 빠지고 앞이 캄캄해진다는게 무슨말인지도 알게 되었지.
이제야 말이지만 란이야, 나는 그 일로 참 오래 아팠다. 또 누군가를 잃을 것만 같아 때때로 우울했고 사춘기시절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니가 거기 있을 것 같아 함께 가고 싶기도 했다.
고마워.
그 시간들 다 흐르고 너 덕분에 사람 귀한줄 알고 간직하고 싶은것, 기억하고 싶은 것도 담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서.
그리고 늦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다시 사과해.
그 날 토요일에 마지막으로 너를 보던 날.
자꾸만 피아노건반을 잘못누르는 널보고
악보가 잘안보인다는 니말을 믿어주지 못한채
다른 친구랑 니가 그냥 틀리는걸 핑계댄다며 속닥거리고 놀려대서.
미안하다.
가끔, 아주 가끔 니생각이 난다.
바람 잔잔하게 부는날,
누군가 아주 작게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들을 때. 또는 목소리 곱게 노래하는 그 또래 비슷한 여자 아이를 볼 때.
곱고 고왔던 네 목소리,
맑은 눈과 미소.
단정하게 묶어 내린 머리.
기억력도 나쁘면서,
사람 기억도 잘 못하면서,
신기하다. 란이야.
니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잊혀지지 않는걸 보면.
참 좋았다.
우리.
그리고 또 몇십년이 흘러도 그렇게 말할게.
잊지 않을게.
장.란.이
어린 시절 친한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리니까 잘 모르겠지, 잊어버리겠지.
하지만 그리 쉽지 않았던건 어른처럼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라질 수도 있다는걸.
무엇이든, 누구든.
어느 순간 갑자기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는 것.
어디서도 배운적이 없고, 경험해보지 못해 그런 슬픔을 극복할줄 모른다는 것.
또 스산한 바람이 분다.
눈을 감으면 그 날 처럼 피아노 소리도 들리고 노랫소리도 들리고 또 그다음다음 날처럼 어떤 날은 눈물 한웅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