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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다.

장례식

by 좋은아침

“몇시에 오실까?”

“아직도 멀었나?”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버스의 뒤를 쫓는다. 설날에는 추운지 모르고, 추석에는 더운지 모르고 대문 밖에서 온종일 기다렸다. 기다림의 대상은 큰집 식구들이었다. 큰아버지가 차가 없어서 큰집 식구들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시골집에 왔다.

매번 올때마다 과자가 가득 든 선물상자는 시골에서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어쩌면 그 상자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는 재미에 큰집 식구들을 아니 큰아버지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나의 키가 조금씩 자라면서 집 밖에서 지나가는 버스를 세지 않았다.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반가움은 어색함으로 변해버렸다.


결혼하고 나서는 보는 횟수가 한껏 줄었다. 여전히 큰아버지는 명절에 시골집에 오셨지만, 시댁을 먼저 갔다가 가는지라 늘 엇갈린 만남이었다. 나이가 드시면서 말 수가 느신 아버지는 혼자 사시는 큰아버지에게 전화하라고 몇 번 이야기하셨다. ‘네’라고 답변을 하고, 바쁜 일상을 핑계 삼아 전화를 해야 하는 것도, 큰아버지의 존재도 흐릿해졌다. 그런 시간 속에서 가족 단톡방이 분주해졌다.


“큰아버지 돌아가셨대.”


큰 언니가 전해준 문자를 보고, 나는 큰아버지에게 전화하라고 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빈소가 차려진 다음 날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누군가의 탄생보다는 부고를 더 많이 듣는 나이가 되어버린 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큰아버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촌오빠, 동생, 언니들은 한참 울어서인지 눈 주변이 빨갛게 변해있었다. 큰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본 순간, 한참 동안 버스를 기다렸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죽음에 익숙해져도 나의 삶에 오랫동안 깊게 박힌 추억을 준 이의 죽음 앞에서는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전화를 해보지 못한 게 후회가 되었다. 후회 없는 삶을 살자가 나의 목표였는데, 나는 또다시 후회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또다시.

절을 하고, 영정사진 속에 담긴 큰아버지를 눈에 담고,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갔다. 피를 나눈 형제가 단 하나뿐인 아버지가 바짝 마른 얼굴로 앉아계셨다. 나보다 수많은 이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인데 얼굴에는 짙은 당혹감이 박혀있었다. 허리를 다치셔서 구부정하게 걷는 아버지를 보니 허리에도 슬픔이 내려앉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놓인 음식을 먹으며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촌 언니들과 일상을 나누었다. 죽음과 일상이 함께하는 공간, 울다가도 웃을 수 있는 공간이 장례식장이 아닐까 싶다.


아버지는 아직 결혼하지 않아서 단출한 큰집이 안타까우셨는지, 모든 장례절차가 끝나는 날까지 우리가 머무르길 원하셨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아버지는 이제 고아가 되었다.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를 잃었고, 정정하실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키우기 위해서 재혼도 하지 않은 할머니가 남겨 놓은 큰아버지도 아버지 곁을 떠났다.

봄볕에 까맣게 탄 아버지의 얼굴, 바람이 드나드는 바짝 바른 몸을 가진 아버지 곁에 한기가 머물렀다. 슬픈 드라마를 봐도 울지 않은 아버지는 어머니를 보내고, 형을 보내고 우셨다. 슬픔의 농도로만 무게를 잰다면 아버지의 눈물은 다른 누구의 것보다 저울추가 한껏 기운다. 아버지의 눈물의 무게는 다른 이의 눈물까지 긁어 모은다.


화장장에서 큰아버지의 형체가 가루가 되는 순간, 아버지는 등을 돌리셨다. 얼굴이 없는 등에도 눈물이 흘렀다. 뜨거운 열기로 가루가 될 때까지 우리는 슬픔 속에서 또다시 일상을 나누었다. 가슴에 폭 안기는 작은 유골함에 큰아버지를 안고, 네모반듯하게 판 땅속에 넣을 때까지 아버지는 단 한순간도 눈길을 거두지 않으셨다. 아쉬움인지, 후회인지, 사랑인지 모든 것이 섞여 있는 그런 것이었다.


묘지를 떠나는 버스 뒤에 수많은 소리가 남겨졌다.


“큰아버지, 편히 쉬세요.”

“아빠, 사랑해요.”

“형, 잘 가. 어머니, 아버지한테 안부 인사 전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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