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도 내 삶이다.

올해 고추농사는......

by 좋은아침

“고추가 다 죽었어. 올해는 고추 농사 다 망했다.”


“에이 엄마, 그렇게 말하고 작년처럼 조금 시든거 아녜요?


“이번에는 정말이야. 정말. 고추 딸 것도 없어.”


“정말이요? 이번 주에 가서 보면 알겠네요.”


친정 부모님은 고추농사를 지으신다. 기운이 넘치실 때는 두 분이서 고추 2만 개를 심으셨는데 나이가 드심에 따라 고추를 적게 심으시고 있다. 그래도 두 분이 하시기에는 많은 1만 개를 올해 심으셨다.


당연히 심을 때, 딸 때, 고추밭을 정리할 때 시간이 나는 대로 도와드리고 있는 중이다. 늘 이맘때쯤에는 엄마 생신도 있어서 가는 김에 고추를 딴다. 30도가 훌쩍 넘는 날씨 속에서 고추를 따면 사우나를 하는 것처럼 온몸에서 수분이 다 빠져나온다. 빠진 수분을 보충하느라 물은 마시지만 뜨거운 날씨 속에서 고추 한 번 따고 나면 며칠은 힘들어서 골골거린다.


늘 궂은 날씨에도 살아남은 우리 집 고추인데 올해는 다 망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당연히 엄마가 고추가 조금 죽은 걸로 투정을 부리신다고 생각했다. 차를 타고 친정으로 가는 내내 도로 옆 다른 집 고추밭이 시들기는 했어도 죽은 게 없었기에 엄마의 말은 더 밑겨지지가 않았다.


2시간 걸려 도착한 친정. 고추밭이 집을 둘러싸고 있다. 정말 우리 집의 모든 고추들이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고추 줄기는 이미 가을이 온 것처럼 누렇게 변해 있었다. 몇몇 고추는 이미 검은색으로 생명을 다 한 상태였다.


엄마의 말이 진짜였다.


다 죽어가는 고추에서 엄마와 여동생은 한 두 개를 건지고 있었다. 이맘때쯤 고추를 따면 고추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서 한 고랑 나오기도 힘들었는데, 엄마와 동생을 보니 휘리릭 하면 한 고랑 나올 정도로 남아있는 고추가 없었다.


점심때 도착했던 터라 일하는 엄마와 동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고추가 죽어서 일을 덜 해서 얼굴이 편안해야 할 엄마는 마음고생을 심하게 해서 인지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엄마는 고추가 죽어서 괜찮다 괜찮다 생각을 하셔도 밤에 자려면 다 죽어가는 고추밭이 생각나셔서 자다가 깨기를 한 달 넘게 하셨다고 한다. 수면 부족이 심해지셔서 수면제 처방을 받고 잠을 청하기도 하셨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엄마가 너무 가엽다는 생각도 들고, 화도 났다.


나의 분노를 토해냈다가는 상처 받을 엄마를 아니 꾹꾹 참아내었다.


“엄마, 이번에는 엄마, 아빠 몸 힘든 거 돌아가신 할머니가 걱정하셔서 일 적게 하시라고 고추가 죽었나 봐. 안 되더라도 마음 좀 편하게 드셔요.”


“그래야지. 근데 이것은 고추밭이 눈 뜨면 앞에서도 보이고 뒤에서도 보이니 이건 원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가 없네. 에이, 잊어야지. 까짓것 올해 농사 망해도 올해 먹을 돈 있으니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엄마를 타이르는 소리가 ‘괜찮지 않다’로 들렸다. 타들어가는 고추밭으로 속이 타들어간 엄마와 달리 아빠는 뭐가 그리 화나냐고 한마디 하셨다. 죽으면 죽은 거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신다. 40년 넘게 함께 사셨는데도 엄마와 아빠가 이렇게 다르시다. 그래도 동생도 있고, 내가 있어서 인지 고추에 덜 신경을 쓰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란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엄마, 동생, 나 이렇게 세 사람은 고추를 따러 밭으로 향했다. 고추가 죽었어도 딸게 몇 개씩은 달려있는 터라 그거라도 따야 했다. 시든 고추를 따니 아무리 한 고랑을 나가도 고추 포대가 채워지지도 않고 그 가벼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운 날씨에 고추를 따는 게 힘들지만 죽어가는 고추를 따는 것은 맘도 좋지 않은 터라 힘이 더 들었다.


도대체 올해는 왜 이리 고추농사가 망한 걸까?


이번에 새로운 비싼 모종으로 바꾸셨다고 한다. 엄마 지인분들도 같은 품종을 써서 많이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집 하우스에서 똑같은 모종을 가져간 우리 집 맞은편 이모 고추밭에는 고추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단 한 그루의 고추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


고추를 심을 때 사용한 물이 차이라고 하면 차이라고 할까? 이모는 고추를 많이 심지 않는 터라 지하수 물을 써서 고추를 심으셨다. 우리는 집 앞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와서 썼는데 저수지 물이 오염된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생각해도 몇십 년을 사용한 물인데 이번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요즘 <미친 농부의 순전한 기쁨>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지금까지 읽은 바로는 친정집의 지력이 약해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몇십 년 동안 같은 작물을 키워서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게 아닐까? 아무리 비료와 분뇨를 땅에 뿌린다 한 들 땅이 힘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부지런한 부모님은 넓은 밭에 풀 한 포기 자라는 게 싫으서 끊임없이 풀도 뽑으시니 풀도 잘 살지 못하는 땅에 고추가 잘 살까라는 생각이 밀려온다.


이번 기회에 고추를 심지 않는 땅에 고추를 심고 땅에도 쉴 시간을 주는 것을 부모님에게 제안을 해보았다. 엄마도 아빠도 그럴 생각이 있는터라 이래저래 고민이 많으신 것 같았다.


땅에 기대어 그동안 살아오신 부모님. 이번에 친정에 다녀오고 느낀 것은 땅이 이제는 그 힘을 잃어서 부모님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년에는 그동안 푸르고 붉었던 고추밭이 일 년간 푹 쉬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해본다. 사람도 땅도 쉴 타이밍이 필요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