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도 내 삶이다.

수박이 어디로 갔을까?

by 좋은아침


“엄마, 나 방학숙제로 수박빙수 만들어야 해.”


“수박빙수가 아니라 수박화채야.”


“그러니까 수박화채 만들어야 해.”


“쫑(아들 애칭)아, 수박이 요즘 비싼데, 수박 대신 멜론으로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안돼. 숙제에 수박화채라고 했으니까 무조건 수박화채를 만들어야 해. 수박이 꼭꼭꼭 필요해.”


“알았어. 알았어.”


아들 유치원 방학숙제 중에서 수박화채 만들기가 있다. 3인 가족인 우리는 수박을 하나 사면 다 먹지 못해서 늘 끙끙거리며 먹는다. 더구나 요즘 수박 가격이 비싸다. 아이 입에 들어가는 게 아깝지는 않지만 그래도 잘 먹지 않는 수박을 사려니 손이 망설여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정해진 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들이기에 유치원에서 픽업을 하자마자 집 근처 마트에 갔다. 여름이니 신선코너 근처에 수박이 있었다. 14000원에서부터 20000원까지 가격이 다양했다. 회원 할인이 되는 전단지를 스윽보고 중간 사이즈의 수박으로 구매를 했다. 그냥 사면 17900원인데 할인을 받으면 14900원이어서 얼른 가지고 온 카트에 넣었다.


수박 이외에는 살 게 없어서 빠르게 지나서 유통기한 임박상품이 진열된 코너에 갔다. 가끔 이곳에 가면 싼 가격에 다양한 물건을 구매하기도 하지만 운이 없을 때는 텅 빈 공간만 보고 아쉬움을 남긴다. 사람들이 장보는 시간대가 아니어서인지 유통기한 임박 상품이 다양하게 있었다. 순대, 막걸리, 소시지, 햄, 간편 조리 생선 등 살만한 게 많아서 동공확장이 저절로 됐다. 아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간편 조리 생선이 있는 걸 보고 얼른 카트에 집어넣었다.


요즘 농업 관련 책을 읽고 가공식품 섭취를 줄이려고 다짐했는데 싼 가격에 마음이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번만 사야지 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카트에 담았다. 막걸리는 남편을 위해서, 순대는 나를 위해서, 생선은 아들을 위해서, 햄은 남편을 위해서, 소시지는 남편을 위해서. 사고 보니 대부분 남편이 좋아하는 것들로 카트가 차 버렸다. 가장 비싼 수박을 고른 아들이지만 자신을 위한 것의 가짓수가 부족하니 입을 내밀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 것만 사는구나. 나도 치즈 들어간 부드러운 소시지 좋아하는데. 입에서 살살 녹는 캐러멜도 좋아하는데. 엄마는 아빠 것만 사는구나. 엄마는 아빠만 좋아하는구나.”


올해 들어 부쩍 아들이 자신이 덜 사랑받거나 자신을 위한 것이 없으면 꼭 편애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한다. 저런 투정을 들으면 귀엽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앞서기에 나도 모르게 지갑을 활짝 열어젖힌다. 넘어가면 안되는데...... 오늘도 아들의 불쌍 모드에 당해버렸다. 아들이 좋아하는 캐러멜과 소시지도 담아 넣었다. 계산대로 가져가는 소시지와 캐러멜을 보더니 아들은 기쁨에 차서 애교도 부린다.


먹을 걸로 유혹이 빠르고 조련(?) 하기 편한 시기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해서 아쉽기도 하지만 아들이 얼른 손수 밥도 해 먹고, 혼자 모든 것을 척척은 아니더라도 서툴게 해 나갈 수 있는 시기가 왔으면 좋겠다고 혼자 생각해 본다.


쇼핑 목록에 없던 것들을 가득 카드에 싣고 계산대에 갔다. 카드 대신 상품권으로 계산을 했더니 수박이 할인되지 않았다. 마트 회원이면 당연히 할인될 줄 알았는데 전단지에 나와있는 카드로 계산을 해야만 할인 적용이 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계산이 끝난 상태여서 할인받지 못한 수박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낄 수 있었던 3000원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집에 오자마자 수박을 물을 적신 키친타월로 닦아서 냉장고에 넣었다. 아무리 중사이즈라고 해도 사이즈가 크다. 수박을 넣으니 냉장고 칸막이가 위로 살짝 들렸다. 아들은 에어컨 앞에서 더위를 식히더니 화채를 만들자고 졸라댔다. 아들 눈에는 방금 장을 본 물건들이 보이지 않나 보다. 저것들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정리해야 하는데. 아들의 머릿속에는 수박화채 생각뿐인가 보다. 가끔 나의 머릿속은 다양한 것들로 복잡한데 아들의 단순함이 가끔 부럽다. 가끔 그 단순함이 나의 속을 꽉 막히게 해도 말이다.


묵직한 수박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로 푹 찔렀더니 잘 익어서 인지 퍽하는 소리와 함께 반쪽으로 나뉘었다. 흥부가 박을 타면 그 안에 온갖 보물이 나왔을 테지만 내가 자른 수박은 씨 없는 수박이라서 빨간 속살만 가득했다. 우선 수박 반은 비닐봉지에 넣어두고 나머지 반은 또다시 반으로 잘라 어제 윗집에서 도넛을 담았던 접시에 담아 비닐로 싸놓았다. 그리고 또 남은 반을 잘라서 냉장고에 넣고 나머지로 화채를 만들려고 식탁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얼른 전화를 들어 윗집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은 유치원을 다니고 있어서 화채 만들기가 공동의 숙제이기에 수박을 주려고 말이다. 전화를 해보니 밖에 있어서 집에 들어오면 온다고 했다. 윗집에 줄 수박도 챙겨놓았으니 나머지 수박도 반을 잘라서 또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을 둔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언니 수박 좀 드릴까요? 방학숙제로 하려고 샀는데. 한 번에 먹기가 많아서 나눠먹으려고요.”


“응, 나야 좋지. ”


“그럼 내일 아침에 배달해 드릴게요.”


“응, 고마워.”


주말에 먹을 양만 남기고 다 나눔을 했다. 받을 때도 좋지만 나눌 때 느껴지는 정은 왜 더 좋을까?


윗집 동생이 수박을 받으러 오면서 식빵 한 봉지를 내밀었다. 순간 원시 시대로 돌아가 물물교환을 하는 줄 알았다. 수박의 반의 반이 식빵으로 변한 순간이다. 순간 더 큰 수박을 샀어야 하는 후회도 밀려왔지만 다음에 더 챙겨준다는 생각에 밀려오는 생각을 걷어찼다.


아침에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친한 언니 집으로 수박 배달을 갔다. 혹시나 수박이 상할까봐 아이스 가방에 아이스팩을 넣어서 들고 갔다. 같은 아파트인데도 더운 날씨에 수박의 상태가 염려되어서 말이다.


언니에게 수박을 주고 바로 출근을 해야 하는 터라 수박을 던지듯(?) 언니 손에 쥐어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출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박을 준 언니에게 문자가 왔다.


“수박 너무 고마워. 이따가 아오리 사과 샀는데 몇 개 들고 갈게.”


수박의 반의 반이 아오리 사과로 변한 순간이다. 수박을 사면 이렇듯 잘려간 자리에 뭔가가 채워진다. 어제와 오늘처럼 수박이 잘려나간 자리에 빵과 사과가 채워지기도 한다. 또 어떨 때는 동생과 언니의 함박웃음이 채워진다. 빵도 사과도 좋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미소가 더 좋다.


비우면 채워진다. 이 말의 의미를 어렸을 때는 잘 몰랐다. 지금도 어리다고 생각하지만(40대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100세 인생에 절반도 안 지났으니... ^^)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그들과 나눔을 하고 서로 마음에 담은 이야기를 비워내면 가슴 안이 가득 채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번에는 수박이었지만 다음에는 무엇을 나눠야 할까 고민이 된다. 아참! 늘 그렇듯 적당히 나눔 해야 부담이 안된다. ^^ 평범하지만 적당한 삶 어렵지만 내가 살고 싶은 삶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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