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경험치를 올리자.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의 엄마와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이를 기관에 보내기 전 나보다 육아를 먼저 시작한 친언니나 지인에게서 ‘아이끼리는 친한데 엄마들은 성향이 맞지 않아.’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반대로 엄마끼리는 친하지만 아이끼리는 성향이 맞지 않은 경우도 많다고 했다.
오 남매의 사이에서 셋째로 자란 나이 성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분쟁을 싫어했다. 한참 친구들과 좋을 나이에도 친구들끼리 서로 편을 먹으려 하면 오히려 혼자 있기를 택했을 정도이다. 이런 나의 성향은 최대한 문제를 만들지 않거나,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그러한 길은 선택하지 않으려 했다. 아직도 뭔가를 하려면 나에게는 안전이 우선이다.
이 점 때문에 남편과 육아를 하면서 자주 부딪혔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다치면서, 실패하면서 성장하는데 가끔 내가 지나치게 그런 기회를 빼앗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 문제로 서로 감정이 상했던 초기보다는 나아졌지만 나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아이가 뭔가를 하려 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는 쪽으로 이끌려하고, 문제가 생기려 하면 개입을 하려고 한다. 나도 최대한 나의 이런 면을 억제하기 위해서 여전히 노력하는 중이다. 가끔 아들을 육아하는 건지 나를 새롭게 키우는 건지 헷갈린다.
다시 아이 친구, 엄마 친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운 좋겠도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의 엄마와도 가장 친구가 되었다. 똑같이 외동아들을 키우고 있다는 점을 비롯해서 다양한 성향이 맞아서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외동을 키우고 있을 때 가장 걱정이 되는 점은 사회성이다. 육아를 시작하기 전 다양한 책을 통해서 사회성이 외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인지 했지만 그래도 형제가 있는 가정에 비해서 갈등을 경험해서 해결하는 기회가 적은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내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친구처럼 문제를 만들고 해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아이가 친구가 자주 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친해진 언니와는 자주 왕래를 하는 편이다. 아무리 사이가 좋더라도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마음이 정말 편해야 가능한 일이다. 내게 있어서는 말이다.
서로 왕래하기를 이제 3년이 넘어가고 있다. 4살 때 처음 집에 초대해서 놀 때,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이들이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애착이 있을 시기여서 같이 잘 놀다가도 ‘내 거야’라고 외치며 싸우기 일쑤였다. 누군가 울어야먄 같이 노는 게 끝이 났다. 초반에는 자주 싸우니 같이 노는 게 부담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언니와 서로 초대를 하기 전 싸우지 않도록 이것저것 잔소리를 닮은 조언을 아이들에게 해야만 했다.
늘 아이들이 행복하게 웃으며 작별인사를 하면 그날만큼은 어려운 숙제를 하는 것처럼 즐거웠다.
4살, 5살 때는 아이들이 싸울 때는 언니와 내가 개입을 해서 중재를 했다. 이 중재의 빈도수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제대로 이야기하면서 현저하게 줄었다. 우리가 굳이 개입을 하지 않아도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도 올 초까지만 해도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해결이 안 되면 아이들이 각자의 엄마들에게 S.O.S를 청했다. 문제는 아이들의 애절한 눈빛 요청에 반응하면 아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가 바로 해결이 되지 않고 누군가는 운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놀아도 꼭 한 명은 울면서 헤어져야 했다.
언니와 나도 아이들의 눈물을 지켜보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언니가 아이들이 경험치가 중요하니 서로가 해결을 할 수 있도록 개입하지 말자고했다. 혹시나 해서 언니 말대로 했더니 아이들이 처음에는 우리 쪽을 바라보더니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서로 티격태격 하지만 그래도 놀고 싶은 마음이 큰지라 다툼을 하다가도 돌아서면 까르르 거리면서 논다. 가끔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부럽다. 어른이 되어서 싸우거나 마음이 상하면 서로가 마음의 응어리를 잘 해결하지 않으면 가까워졌을 때보다 두배, 세배만큼 관계가 멀어지고 만다. 가끔은 아이처럼 티격태격하다가도 돌아서면 까르르 거리고 싶다. 어른이 아니라 애어른이면 좋을텐데.
어제는 아들 절친의 생일이었다. 생일선물은 내가 따로 준비해놓고, 아들에게는 천 원을 주면서 친구가 좋아할 만한 것을 직접 골라서 사도록 했다.
“엄마, 00 이가 뭘 갖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물어보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음,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 그래도 잘 생각해봐. 00 이가 받으면 좋아할 거를. 먹을 것도 좋고.”
아들은 먹을 거라는 단어가 해답이 되었는지 한 참 고민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음, 00 이는 초코송이를 좋아해요. 그거 사러가요.”
우리는 초코송이와 선물 포장지를 사러 마트에 갔다. 아들 손에 쥔 천 원에 딱 맞게 초코송이 두 상자가 붙어있는 게 딱 그 가격이었다. 초코송이와 아이들이 직접 고른 빨간색 하트 포장지를 사서 집에 와서 정성스럽게 포장을 했다. 포장은 나의 몫이었지만 말이다.
아들의 친구는 내가 준 선물보다 아들이 준 초코송이를 더 좋아했다. 좋아하는 친구의 모습을 언니가 찍어서 보내준 사진을 보고 아들도 엄청 좋아했다.
작은 돈 천 원이었지만 아들이 친구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 안에는 깊게 새겼을 것 같다. 돈이 많이 드는 경험도 아이를 성장시키겠지만 아들이 여러 번 끓인 사골국처럼 찐한 소소한 행복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으면 한다.
글을 쓰면서 갑자기 초코송이가 먹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