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조금은 무섭다.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 그녀는 고장 난 이유를 찾기보다는 고장 난 기계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맡은 일이 주어지면 척척하는 그녀이지만 사용하던 가전제품 등이 고장 나면 안절부절못하지 못한다. 고장 나서 잘 작동하지 않은 컴퓨터를 보고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쉰다. 고작 컴퓨터가 고장이 난 것일 뿐인데 세상에 가장 안 좋은 일이 일어난 듯 깊은숨을 내쉰다.
땅이 꺼질 것 같은 무거운 그녀의 숨은 그녀를 어린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쉬익 쉬익, 덜덜덜, ' 시끄러운 소리가 어린 그녀 몸을 감싼다. 농사를 짓는 그녀의 아버지는 고추밭에 농약을 뿌리고 계신다. 고랑이 긴 고추밭에 농약을 주기 위해서는 농약 줄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녀의 아버지가 키가 훌쩍 자라 몸을 삼키듯 커버린 고추 속으로 사라진다. 그때부터 그녀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줄을 잘못 잡아당기면 아버지가 뭐라고 할 텐데. 아 잘 보이지도 않고, 미치겠네.'
그녀는 눈치껏 고추 위로 뿌려지는 수증기 같은 농약을 보고 아버지의 위치를 짐작한다. 잡아당기는 농약 줄을 천천히 뒤로 나오는 아버지의 발걸음만큼 잡아당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당겼는데도 줄이 딸려오는 것을 보니 아버지의 걸어 나온 발걸음보다 당겨야 하는 줄이 여전히 남아있나 보다고 그녀는 짐작한다.
조금 전 과는 달리 조금 빠르게 줄을 당긴다. 한 번, 두 번, 더 당기려 하자 아버지 쪽에서 농약 줄을 세차게 잡아끄는 힘이 느껴진다. 아버지의 발걸음보다 줄을 더 빠르게 당긴 것이다. 그녀의 등에서 땀이 흐른다. 혹시나 잘못했다고 아버지한테 혼날까봐.
한 고랑을 나오고 나서 아버지는 줄 좀 제대로 당기라고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신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는 그녀의 긴장감 때문인지 한 번만 더 잘못하면 혼난다로 해석되고 만다. 오늘은 농약을 주어야 하는 고추밭이 여러 곳이다. 여러 곳이기에 검은 거대한 통 두개에 농약을 아버지가 희석해 놓으셨다. 한 통을 다 줄 무렵 아버지가 뭐라고 손짓하신다. 농약을 빨아들이는 호스를 다른 통으로 옮기라는 뜻이었지만 우렁차게 울리는 경운기 소리에 그녀는 잘못 알아듣고, 경운기를 꺼버린다.
경운기에서 나는 소음이 사그라들자, 아버지가 달려온다.
"아니 경운기를 도대체 왜 끄는 거야. 끄란 말도 안 했는데. 농약 주는 거 한 두 번 해보는 거 아니잖아."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에 기가 죽어 그녀는 몸을 감싸는 떨림을 떨치기 위해서 아버지의 시선을 피한다. 농약을 줄 때마다 아버지에게 혼난 그녀는 기계와 관련된 일은 무조건 피하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나 자신이 만졌다가 고장 날까 봐 하는 두려움이 늘 그녀를 앞선 것이었다.
신제품 텔레비전을 봐도 그녀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상하게 낯설고 자신이 모르는 것들이 튀어나오면 어렸을 때 경운기 소리가 가득한 그 공간에서 아버지에게 혼이 났던 순간이 떠오른다.
아무리 기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해도 그녀는 잘 되지 않았다. 오죽이야 컴퓨터가 고장이 나면 새로운 컴퓨터로 바꿔버리는 짓을 수없이 해댔다. 주변에서 돈지랄을 한다고 해도 고장 난 것을 고치느라 기다려야 하는 긴장감이 그녀는 더 견디기 어려웠다.
어린 시절 겪었던 경운기 소리로 인한 기계에 대한 두려움을 그녀는 극복할 수 있을까?
그나마 결혼을 하고 그녀는 차차 나아지는 중이다. 부서진 것을 고치면서 즐거움을 얻는 남편 덕분에, 고장을 내도 괜찮다며 토닥여 주는 남편 덕분에, 그녀의 쉽게 극복하기 어려웠던 기계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나아지고 있다. 지금도 새로운 가전제품을 보면 긴장을 하는 그녀다. 달라진 점은 누군가 알려주면 모르는 것보다는 해보는 게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만져보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는 경운기 소리가 들리면 긴장한다. 그래도 나아지고 있으니 그녀는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