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의 유럽병 후에 발견한 것
어렸을 때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군것질하는 아이들을 보면 마냥 부러웠다. 엄마가 간식거리는 사주셨지만, 군것질은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달고나가 탐이 났다. 학교 앞에서 피카츄 달고나가 유행이었는데, 달콤한 설탕 냄새와 시시각각 변하는 색을 보면 나도 사 먹고 싶었다. 달고나가 먹고 싶다고 엄마한테 조르면, 엄마는 달고나를 한 냄비째 만들어주셨다. 플라스틱 통 몇 개를 채울 만큼 많은 양이었다. 며칠 동안 달고나를 질리도록 먹고 나면 그 후 일 년 동안 다시는 달고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행도 이런 것일까. 언젠가부터 연휴가 생기면 비행기 표를 알아봤다. 휴가도 체력도 생활비도 차곡차곡 모아서 한 번에 터트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어떤 해에는 여행 목적으로 일 년에 유럽을 4번이나 갔으니 합치면 10번은 족히 넘게 간 것 같다. 별다른 이유도, 목적도 없이 관성적으로 여행하던 무렵, 프라하의 한 카페에서 이제는 그만 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 테마여행, 이것저것 많이 해봤지만 가장 재미있는 것은 사람 구경이다. 동네의 이름 모를 아무 식당이나 카페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한다. 종업원은 바쁘게 일하고, 사장님은 가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문제가 있는지 살핀다. 카페에 앉은 여자는 손발 짓을 해가며 열심히 말하지만 맞은편 남자의 표정은 어쩐지 시큰둥하다. 여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더 큰 목소리와 더 큰 제스처로 더 크게 말하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마음이 짠하다. 맞은편 젊은 커플은 옆 테이블의 상황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이마를 마주 대며 작은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인다.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에 보고 있던 나도 어느새 웃음 짓게 된다. 카페 밖에서는 사장님이 밖에 물건을 파는 사람과 실랑이가 붙었는지 열심히 침을 튀겨가며 말한다. 저러다 싸우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다가도 잠시 오 분 정도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제스처로 대화가 마무리된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토닥인다. 대화 중에 합의점을 찾았나 보다.
언어는 모르지만 그들의 드라마를 이해해보려 시도한다. 상황과 맥락을 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도 같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은 나의 상상력과 추리를 한껏 동원한다.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흐른다. 흥분한 목소리가 화난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지금 먹고 있는 커피가 얼마나 맛있는지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현지인들이 말을 걸어줄 때이다. 흔히 “어디서 왔어요?”로부터 시작하는 대화는 그들의 일상이나 세상 사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조금 전까지 사장과 곤란한 얘기를 나누거나 까다로운 손님을 상대하던 웨이터도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들의 표정은 아무 일 없었던 듯 해맑다.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긴다. 그런 여유로움에 나까지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언어와 문화는 다를지언정, 그들의 일상은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여행객이 되어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들을 보면 큰일도 별일 아닌 듯했다. 좋으면 좋은 대로, 문제가 있을 땐 문제가 있는 대로 다들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동질감과 연민과 애잔함과 여러 가지 감정들이 한데 뒤섞였다. 어쩌면 그들에게 보내던 응원의 눈길은 나에게 보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내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내 삶을 보고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방인처럼 한걸음 떨어져서 내 일상을 별일 아닌 듯 무심하게 바라보려고 이 먼곳에 왔다.
여행지에서 하루하루는 특별했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일상은 그대로였다. 여행이 삶이 되면 다르지 않을까 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어떤 삶에도 희로애락이 있었다. 오히려 현실에서 불안하거나 도망가고 싶을 때 여행을 떠올릴 때가 많았다. 여행에서 얻은 것은 별일 없이 잘 살아가고 있다는 심심한 위로였다.
프라하의 어느 창가에서, 문득 더는 습관처럼 유럽에 오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해외가 아니더라도,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내 인생을 멀리서 보는 방법은 많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한동안 빠져있던 여행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어느덧 유럽여행은 추억이 되어버렸다. 코로나 19로 예전처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지 모르겠다. 사람 마음이란 게 괜히 못 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지만, 유럽여행에는 크게 미련이 없다. 더 늦기 전에 여행에서 원하던 것을 깨달아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