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미학
여행 짐을 싸는 건 일이다. 아무리 간단하게 싸도 2시간은 족히 걸리는 것 같다. 넣을 물건을 고르는 것 보다 뺄 물건을 고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여행을 가기 하루 전날 빈 트렁크를 꺼내서 하나둘 생각 없이 넣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여행 가방이 찬다. 챙기지 못한 물건은 많은데 공간이 없다. 더 넣고 싶다가도 여행 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그럴 수가 없다. 여행 짐은 짐이다.
내 삶도 여행 가방처럼 오랜 시간 채워져 있었다. 나는 감각주의자였다.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자극을 좋아했다. 소소하게는 음식 맛, 옷장 서랍, 핸드백부터 언어표현, 스케줄 관리, 여름휴가 계획,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습관적으로 빽빽하게 채울 때가 많았다. 삶에 공간이 없었다.
삶에 채워진 상태에서는 하나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온전히 집중하기에는 주위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 항상 있었다. 핸드폰의 용량은 꽉 차서 시도 때도 없이 알람이 울렸고, 예쁜 옷을 사도 옷장에 공간이 부족해서 구겨 넣거나 팽개쳐 놓기 일쑤였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도 대화 중에는 다음 약속을 신경 쓰느라 시계를 흘낏거렸고, 가끔 훌쩍 여행을 떠나려 해도 주말에는 거의 늘 선약이 있었다.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면서도 버거운 줄 몰랐다. 익숙한 것이 무서운 법이었다. 제대로 쉬려면 삶에 정리가 필요했다.
그 무렵 요가를 배우다 ‘생명력은 공간 사이로 흐른다.’라는 문구를 들었다. 내 상황을 관통하는 한마디였다. 정리정돈의 기본은 비우는 것이었다. 몸부터 마음, 물건, 사람, 시간 하나씩 비워나갔다.
군것질을 끊었다.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집중적으로 먹던 군것질을 멈췄더니, 점심과 저녁 사이에 공복이 생겼다. 몸이 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이 예전보다 맛있었다. 운동할 때는 잘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강도를 낮췄다. 뻣뻣한 대로, 굳은 대로 내 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무리하지 않으면서 운동했다. 처음에는 대충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몰려왔지만, 오히려 운동 후에 활력이 생기고 시원하고 개운한 느낌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일정 사이에는 충분히 간격을 뒀다. 일상의 경험들은 소화하고 해석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중요한 일일수록 쉬면서 곰곰이 곱씹어본 후에야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기계적으로 스케줄이나 목표를 소화하는 데에만 집중하면, 애써서 성취한 후에도 남는 게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쁜 후에 공허함이 찾아오는 이유였다. 글을 쓰거나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 영감은 멍하게 있다가 문득 얻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공간에서 생각이 자라났다.
관계에서도 빈자리가 필요했다. 만남은 즐겁고 이별은 슬펐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관계는 한정적이었기에 무작정 채울 수 없었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관계의 거리는 매 순간 변하고 있었다. 만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머리가 복잡해지고 힘이 빠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좋은 인연이 올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려면 때로는 외로움에, 의무감에, 미안함에 유지했던 인연에 종지부가 필요했다. 나의 빈자리를 두고 사람들이 편안하게 오갈 때 관계는 가장 건강했다.
기회는 여유가 될 때 알아볼 수 있는 법이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좋은 기회를 알아보기 어려울뿐더러, 알아보더라도 잡을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 다가오는 작은 사건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더니 삶이 풍성해졌다. 일상의 틈 사이로 좋은 기회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별 기대 없이 가볍게 시작한 일이 큰일로 펼쳐지기도 했다.
비울수록 해방감이 몰려왔다. 비울수록 사는데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막상 없어지면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필요해서라기보다 순간의 두려움과 욕심으로 쥐고 있을 때가 많았다.
요즘은 여행 갈 때 가방을 반만 채우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하다 보면 짐은 처음보다 늘어나기 마련이고, 여행지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더라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내 인생도 여행 가방 같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