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모아 정승 코스프레

1. 20대에 찾아 온 사춘기, 그리고 취미의 시작

by 지금

친구들과 미술관을 가면 참 재미있다. 저마다 취향이 다르다. 누구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북유럽풍을, 누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꽉 찬 맥시멀리즘을, 누구는 철저한 인상주의를 좋아한다. 나는 절제된 고급스러움을 좋아한다. 취향은 삶에도 묻어나는 것 같다. 몇 시간 동안의 대화보다 이런 취향이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검소하셨던 부모님을 보며, 어렸을 때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막연히 동경했다. 일자리를 갖고 생활비를 벌면서 원하는 대로 돈을 쓸 수 있었다. 돈을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쓰는지 내 마음이었다. 진정한 어른의 완성은 재정적 독립에 있었다.


회사생활이 익숙해지면서,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공허함을 보상받고 싶었다. 수중에 돈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자본주의 세상에 돈으로 즐거움을 살 방법은 정교하고 다양했다.


혀끝의 즐거움을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동네 맛집으로 가볍게 시작했지만, 맛집의 세계에 눈을 뜨면서 청담동, 압구정의 유명 레스토랑으로 넓혔다. 식사뿐만 아니라 레스토랑의 인테리어, 서비스와 분위기를 즐겼다. 식사의 즐거움이 단순한 미각을 넘어서 시각, 청각, 후각, 촉각까지 오감을 자극하는 시간으로 확장되었다. 현실은 어떨지언정, 근사한 곳에서 좋은 서비스를 받으면서 식사를 하면 그때만큼은 성공한 것 같았다.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호텔 레스토랑을 찾으면서 식사 후의 바를 가고, 호텔에 묵는 일이 늘어났다. 이른바 호텔 투어를 다녔다. 호텔마다 분위기가 조금씩 달랐는데 인테리어, 컨셉, 음식, 친절도, 시설설비의 미묘한 차이점을 품평하는 재미가 있었다. 근사한 5성급 호텔도 점수를 매길 때는 내 발아래 있는 것 같았다.


호텔에서 열리는 클럽파티, 풀파티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음악, 술, 분위기, 사람들 할 것 없이 화려했다. 한 번씩 마주치는 유명인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나도 힙한 것 같았다. 신선하고 자극적이었다.


화려한 환경을 접하면서 나 역시 한창 힘을 주고 다녔다. 옷, 신발, 가방 같은 외형부터 어울리는 사람, 취향, 라이프스타일할 것 없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을 추구했다.


호텔이나 파티를 가지 않는 날에도 씀씀이가 커졌다. 바우처로 호텔 이용권이 나오는 프리미엄 카드를 만들고, 자주 가는 곳의 회원권을 샀다. VIP 레벨을 유지하고 회원권을 쓰려면 그만큼 소비가 따라줘야 했다. 자주 가는 식당, 병원, 미용실, 병원, 클럽까지 생활 반경이 강남으로 집중되면서 청담동으로 이사를 했다.


신입사원의 월급은 혼자서 생활하기에 충분했지만, 아주 풍요로운 것은 아니었다. 번 돈을 노는데 다 썼다. 월급은 통장에 입금되기가 무섭게 카드값으로 빠져나갔다. 저축이 불가능했다. 권태로움에 찾았던 레스토랑, 호텔, 파티가 어느덧 일상의 중심이 되었다. 내 생활을 유지하려면 회사에서 돈을 벌어야만 했다. 주종관계가 바뀌었다. 사치스러운 일상을 유지하기 빠듯했다.


그 무렵 피부과에 갔다. 진찰을 받으려고 누웠는데 무언가가 거슬렸다. 머리맡에 놓인 베개의 각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침대 시트의 재질도 별로였다. 왜 이렇게 해놓았는지 짜증이 났다. 어딘가 삭막한 간호사분들의 말투도 불편했다. 병원은 지극히 평범했다. 그게 불만이었다.


좋은 서비스에 익숙해지다 보니 그렇지 않은 것들은 짜증이 났다. 고급스러운 것들이 당연할 만큼 내가 태생적으로 부자인 것도 아니었다. 생활수준만큼 나의 기준도 높아졌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일상적인 것들이 불편했다. 기분 좋은 자극을 찾아다니다 불편한 게 더 늘어났다. 한번 내 기준을 통과한다고 해서 계속 좋지도 않았다. 좋았던 것들은 금방 시시해지고, 눈은 끝을 모르고 높아졌다. 예전에 마음에 들던 것도 일 년 후에는 별로였다. 취향이 정교해지고 감각적 기준이 높아질수록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 늘어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서웠다. 내가 현실을 외면하면서 이상을 좇아가는 속 빈 강정처럼 느껴졌다. 신기루 같은 세상에서 평생 살 수는 없었다. 인생에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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