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고참만 출전합니다

by 곱게자란아빠

"더럽게 못하네 진짜!"


8회 말 마무리 투수가 동점에 이어 역전까지 허용했다.

옆에서 같이 중계를 보던 아들이 흠칫 놀라 나를 쳐다본다.


야구라는 스포츠는 정말 백해무익하다는 게 진리이다.

보면 볼수록 성격만 더 나빠진다.

혼자 볼 때면 욕도 하고 채널도 돌리고 한숨도 쉬고 하지만

어린 아들과 볼 때면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요즘 같은 연패 분위기에는, 그 자제가 잘 안 된다.


하위권 팀에게 3연전을 내리 지고, 결정적인 기회를 날리는 걸 계속 보고 있자니

참았던 분노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게다가 사무실에 숨어있던 롯데와 한화팬들이

최근 팀 상승세에 커밍아웃을 넘어

"탑데", "탑화"를 입에 올리는 게 이 분노의 장작 역할을 했으리라.


"아빠 왜 그래? 워워~"


"아니 너무 못하는 거 아냐?"

"매번 저래. 오늘도 대량 점수를 낼 기회가 많았는데 점수를 못 내니 역전을 당하는 거잖아"

"아니. 감독도 그래. 고참 선수가 좀 지쳤다 싶으면 신인들도 기용을 하고

유명한 선수라고 잘하냐? 매번 못해도 이름보고 기용을 하니깐 저 모양이잖아!

파이팅 넘치는 신인 위주로 출전 기회를 주면

몸값 높은 선수들 자극도 좀 받고,

어린 선수들이 더 잘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아들 어떻게 생각해?"


속사포처럼 내뱉는 나의 말을 듣고 있던 와이프가 건너편에서 피식 웃는다.

그러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왜?"

"당신 방금 한 말. 이중적인 거 알아?"

"무슨??"


"올 초에 일정 빠듯한 프로젝트 진행할 때 일이 특정사람한테 몰린다고 걱정했잖아"

"그래서 내가 '팀에 다른 사람이 없어? 다른 사람들도 시켜'라고 했더니 뭐라 그랬는지 기억 안 나?"


"..."


"그 친구들은 아직 잘 모른다고. 일정 안에 할 수 있을지 믿음이 안 간다고"


"그건 맞지. 실력 차이가 있는데"


"그래. 당신 그때도 그렇게 말했어.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냐.

일을 하다 보면 느는 거니 기회를 많이 줘야 된다고"


"그랬더니 뭐라더라?

이번 프로젝트가 일정이 빠듯해서 그렇게 기회를 줄 만큼 여유가 없다고 했던가?"


"맞아. 개발 일정이 너무 짧긴 했어."


"일이 몰리는 사람이 번아웃될까 걱정하면서 다른 사람을 쓰지 않는 당신이랑

저 야구 감독이랑 뭐가 다른데?"


".. 아니.. 뭐 이 경우랑은..."


"저 감독도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게 고참이고 몸값 높은 선수라 그러겠지!"



'뭐지, 거울치료인가?'


때마침 상기된 감독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혔다.

야간 경기임에도 짙은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이유는

분노와 슬픔과 민망함과 기타 등등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음이 틀림없으리라.


생각해 보면, 요즘 잘하고 있는 한화나 롯데의 명 감독들을 보면

선수들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잘 읽는 것 같다.

지쳐 있는 고참을 잠시 쉬게 하고,

의욕 넘치는 신인을 기용하면서

팀 전체에 적절한 긴장감과 더불어 숨 쉴 틈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걸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내가 믿고 기대는 팀원들 사이에서도

누군가는 지금, 교체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모든 경기를 이기는 건 아니니깐.

어쩌면 지금 필요한 건,

완벽한 한 방보다는

선발에서 잠시 내려와 쉬게 해주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처음 오르는 누군가에게

"긴장되겠지만 괜찮아. 힘껏 휘둘러봐도 돼"

그 한마디를 해주는 것.


야구든, 일이든

우리는 결국 사람을 믿고 함께 가는 일이니깐.

이런 깨달음을 주다니...

야구는 역시 볼만한 스포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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