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표는 집에 가기

by 곱게자란아빠

아침부터 지루하게 이어지는 컨셉 보고. 시작부터 공기가 묵직하다.

보통 개발 일정은 6개월이다.
신규 컨셉 기획에 한 달, UX 디자인 한 달, 개발 3개월, 마지막 검증 한 달.
이렇게 약속하고 킥오프를 한다.

이 일정에서 유일하게 절대선인 건 검증 일정.
품질이 상품화 여부를 결정하니까, 검증팀의 한 달은 무조건 보장돼야 한다.
6개월짜리 프로젝트가 늘 그렇듯, 앞단이 미끄러지면 뒷단은 뛰어야 한다.

컨셉이 늦어지면 UX가 밀리고, UX가 밀리면 개발 일정이 줄어든다.
모든 지연은 결국 개발이 감당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개발은 주말을 넘기고, 밤을 넘기고, 가끔은 사람도 넘긴다.
이직이든 병가든, 탈출이든. 결국 하나씩 빠진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컨셉 정리에 시간이 오래 걸렸고,
UX팀은 줄어든 일정 안에서 야근을 일상으로
겨우 디자인 가이드를 만들었으며,
오늘 그걸 들고 보고하러 온 거다.

슬라이드는 천천히 넘어간다.
디자인은 깔끔하고 설명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임원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이건 왜 이렇게 했어요?"
"이건 사용자 입장에서 좀 불편하지 않을까요?"
"전 이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네요."

피드백은 날카롭고, 짜증이 묻어 있었다.

발표자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한두 번 대응하다 멈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안다.
이쯤 되면 어떤 말도 쓸모없다는 걸.

그리고 결국, 나왔다.

"여러분, 실무자들이 사용자 입장에서 고민을 해야 해요!!
좋은 제품, 내가 쓰고 싶은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그게 여러분의 목표가 돼야죠."

회의실은 조용했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그 순간, 옆자리에 앉은 UX 디자이너의 손이 움직였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메모지에 뭔가를 적는다.
내 눈에 그 문장이 들어왔다.

“나의 목표는 집에 가기.”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이 회의에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 회의에 딱 맞는 정답이었다.

말없이, 조용히.
그녀에게 마음속으로 엄지를 올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의 특이한 화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