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연습

뭐라도 해보기 vs 아무것도 안 하기

by 곱게자란아빠

1년 살기를 하러 호주에 간 동기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나와 함께 입사해서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일상을 묵묵히 견디던 친구였다.
그러다 작년 이맘때쯤, 갑자기 어린 딸까지 덜쳐 업고 호주로 날아가 버렸다.
휴직계를 낸다는 말은 들었지만, 진짜 갈 줄은 몰랐다.

귀국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대화 내내, 그 1년이 꽤 만족스러웠다는 게 뚝뚝 묻어났다.

출국 전에 운전 연수받는다고 했던 기억이 났는데,
이제는 우측 운전석에 앉아 도로 반대 방향으로도 거침없이 운전한다고 했다.
딸아이 학교에서 도시락 만드는 자원봉사도 자청했고,
운동과는 거리가 멀던 친구가 골프를 배워 필드에 나간다는 말에는 약간 경이로움까지 느껴졌다.

1년 사이, 이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진도 몇 장 보내왔다.
끝없이 펼쳐진 언덕과 해변, 이상하게도 햇살까지 여유로워 보이는 하늘.
그것과 함께 도착한 말이 더 인상 깊었다.

“남들 1년 휴직 후딱 지나간다더니, 아니더라.”

“왜? 거기서 할 일이 없어서?”


“아니, 하나하나가 다 기억에 남아서 그래.
한국에서의 일상은 새로운 게 없으니까 그냥 휙 가는 거고.”
"똑같은 건 압축해서 하나만 저장하면 되잖아.ㅎㅎ
여긴 뭔가, 매일이 다 저장되는 느낌이야. 그래서 시간이 빠르지 않아."

이과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듣고 한참 멍하니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의 나는 매일이 복붙 같아서, 정말이지 정신없이 빨리 지나간다.

그 대화가 마음에 남아 있던 어느 날,

또 하나의 대화가 겹쳐졌다.

이번엔 회사 후배였다.

“선배, 저 이번 휴가 제주도 가요.”
“몇 박 며칠?”
“2주요.”

남은 연차를 몽땅 끌어모아 제주로 떠난다는 소식.

“2주간 뭐 할 거야?”
내가 물었고, 후배는 신나서 대답했다.

“요가도 하고, 매일 산책 코스 바꿔보고,
자전거 타고 미술관도 가고,
그리고 저녁엔 1일 1회 먹을 거예요. 회요 ㅎㅎ”

특별한 일정은 하나도 없었다.
너무 단순한 말들인데, 그게 너무 부러웠다.
그 단순함이 오히려 고급져 보였다.

후배가 계획의 마지막으로 던진 한마디가 딱이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안 하고 책 읽을 거예요.

그게 진짜 하고 싶은 거.”

그 말을 듣고 나니까,
호주에서 낯선 풍경과 언어 속에서 전투력 키워온 동기랑,
제주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음을 채워오겠다는 후배랑
둘 다 너무 멋있어 보였다.

하나는 무언가를 열심히 해보는 휴가,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의미가 있는 휴가.

회사일 마치고 집에 와서 눈 감았다 뜨면

다시 시작되는 하루를 살아간다.
집에 오는 길에도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그 마음조차 욕심처럼 느껴지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어느 날엔 정말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조금은 새롭고, 조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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