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받고 싶은 선배, 쓸모있고 싶은 후배

by 곱게자란아빠

낮에 후배 B와 나눴던 대화가 자꾸 떠올랐다.
"저는 돈 조금 덜 벌어도 즐거운 일을 하고 싶어요."
스무 해 넘게 코드를 짜고, 버그를 잡으며 살아온 나에게 '즐거운 일'이라는 말은 아직도 조금 낯설다.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즐거운 일을 하면서 돈도 많이 벌 수 있으면 그게 최고의 직업이지 않을까? 너네는 꼭 그런 직업을 찾아봐.
아쉽게도 아빠는 그걸 못 찾았지만..."


그러면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늘 받아친다.
"여보, 즐겁던 일도 직업이 되면 더 이상 즐겁지 않아.
즐겁진 않아도 돈을 많이 버는 일을 하고, 그 돈으로 즐거운 일을 하는 게 현실적인 정답이지."
맞는 말이다. 반박하고 싶어도 반박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B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아내의 현실론을 되뇌고 있었다.
회사는 원래 재미없는 곳이고, 우리는 그 재미없음을 견디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회사의 공식이었다.

그런데 B의 이야기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사람들이 회사는 돈 벌러 가는 곳이라 재미없다고들 하잖아요. 근데 저는 회사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보람'과 '성취'인 것 같아요.
그걸 내려놓고 일하는 건... 좀 어렵더라고요."

그러면서 B는 최근 일을 들려주었다.
임원의 외부 강연 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처음엔 타운홀 발표 자료인 줄 알고 시작했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임원 개인의 연혁과 성과를 정리하는, 좀 사적인 문서였다고. 상사가 시키는 일이니 말없이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고 했다.

"그래도 제가 하는 일이 개인이 아니라, 조금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
그게 제겐 회사 생활의 즐거움이에요."

순간, 바로 대답하려던 손이 멈췄다.
'보람'과 '성취'.
나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보람의 마지막은 조금 달랐다.
나는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때, 가장 큰 에너지가 생긴다.

"난 인정 욕구가 좀 있어서... 인정받는 느낌도 꽤 중요해요."

내 고백에 B는 웃으며 말했다.
"근데 전 외적 인정은 고과나 연봉, 더 좋은 기회 말고는 잘 안 믿게 되더라고요.
가끔 상사분들이 칭찬해 주실 때... 음, 뭐랄까. 아귀가 안 맞는 기분이 들어요."

그 말에서 이유 없이 뜨끔했다.
내 마음의 어디쯤을 정확히 건드린 느낌이었다.

나는 종종 후배들에게
"잘했어", "역시 김 프로야",
"이건 박 책임 아니면 못 하지" 같은 말을 건넨다.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격려라고 믿었기 때문이고,
실은 내가 그런 말로 버텨온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B에게, 그리고 요즘의 많은 후배들에게 그런 칭찬은 어쩌면 공기를 흔드는 소리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기분을 맞춰주는 ‘인정’이 아니라 내가 사회 안에서 쓸모 있는 존재로 기능하고 있다는 확신,
그 조용한 자긍심인 듯했다.

나의 만족이 타인의 시선에 있었다면
B의 만족은 스스로의 기준에 있었다.

"그렇게라도 말씀해 주시는 게 좋은 상사죠. 제가 배부른 소리인 거예요."
B는 민망한 듯 말을 마무리했지만,
나는 대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메신저 창을 닫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내가 받고 싶은 것을 남에게 주면서
'난 좋은 선배야.' 하고 스스로를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온전한 개인으로서 가치 있고 싶다는 그 단단한 마음 앞에서
내 인정 욕구는 조금 초라해 보였다.

내 손끝에서 나온 결과물이 누군가에게, 그리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쓸모 있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매우 근사하게 느껴졌다.
남의 인정보다 스스로의 자긍심을 먹고사는 사람들.
그들이 만드는 결과물은 분명 다를 것이다.

회사가 재미없어지는 순간에도
일의 의미를 다시 묻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힘이 된다.
우리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뛰고 있는지.
이런 대화가 가끔은 삐뚤어진 균형을 다시 맞춰놓는다.

즐거움, 보람, 성취, 인정, 그리고 쓸모.
우리는 그 사이 어디쯤에서
저마다의 균형점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것 아닐까.

오늘 B와 나눈 대화는
그 균형점을 다시 손바닥 위에 올려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대화가, 참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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