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괜찮다고 믿고 싶은 마음
"광교자가에 김 부장님",
"왜 그러세요. 인천자가 백 부장님"
요즘 우리 또래 부장들이 모이면 한 번쯤 불러보는 호칭이다.
요즘 꽤 인기 있다는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다.
보는 사람의 한숨을 절로 끌어내는 그 ‘김 부장’은,
짠함과 씁쓸함을 한꺼번에 품은 존재다.
평생 회사를 위해 살았지만 후배에게 밀려나고,
믿었던 임원에게도 버려지는 인물.
그러면서도 그 현실을 인정하지 못해
어딘가에서 발버둥 치는 가장의 비애.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듯 말한다.
"그래도 서울에 자가 있고, 회사 다니면서 아들 대학까지 보냈으면 성공한 거지."
"에잇. 우리가 저 정도 꼰대는 아니지. 저건 너무 갔다."
조금은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아직은 괜찮다"라고 자신을 달래는 것.
그렇게 우리는 드라마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적어도 나는 '말이 통하는 부장'이라고 믿으며.
며칠간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한풀 꺾인 늦가을 오후였다.
프로젝트 막바지라 푸석해진 팀원들의 얼굴을 보니
카페인이라도 채워줘야겠다 싶어 산책을 제안했다.
"오늘 커피는 제가 쏩니다. 스벅으로 가죠."
그 말에 팀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때 막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 우리 부장님은 믹스파 아니어서 좋아요."
순간, '믹스파?'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막내가 서울자가 김 부장 이야기를 꺼내며
드라마 속 김 부장이 탕비실 믹스커피로 생색내는 모습 때문에 요즘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 '믹스파 부장'이 기피 대상 1호라고 귀띔해 줬다.
나도 본다고 맞장구치려던 찰나,
입사 10년 차 유 과장이 묘한 미소를 띠고 끼어들었다.
"요즘 친구들 단톡방에서 이 드라마가 매우 핫하답니다. 투표도 한다던데요. 회사 부장들 중 누가 제일 김 부장스럽냐고."
그 말에 내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유 과장은 곧장 장 사원을 보며 말했다.
"너네 방엔 우리 부장님 몇 위냐?"
장 사원은 잘 익은 홍시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닙니다. 저는 정말 부장님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하하..."
어색함이 온몸에 퍼질 무렵,
유 과장은 굳이 한마디를 더 했다.
"그러고 보면, 장 사원이 신형 그랜저 뽑았을 때도
부장님은 눈치 안 주셨잖아요. 꼰대라면 그런 거 싫어할 텐데."
칭찬인지 경고인지 모를 묘한 상황을 빠져나오기 위해 유 과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 과장님, 탕비실에 커피믹스 먹고 싶군요"
모두들 웃었다.
햇살 아래 퍼진 웃음소리는 경쾌했지만
내 마음 한쪽에 남은 씁쓸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같은 드라마를 보지만
우리는 완전히 다른 장면에 반응한다는 사실.
부장들은 김 부장의 축 처진 어깨,
퇴장하는 뒷모습에 마음이 쓰려서 감정 이입을 하고,
팀원들은
그가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믹스커피를 휘젓는,
고집불통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치를 떤다.
그 둘 사이에서 나는 어떤 등을 보이고 있을까.
스벅 아메리카노를 사줬다는 사실이 그 답을 가려주진 않는다.
오늘 유난히 커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