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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처방받다

by 곱게자란아빠

"그래서, 병원에서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유독 큰 눈을 가진 중년의 의사가 내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던진 첫마디였다.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품고 찾아온 걸까?
갑자기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

최근 회사 업무에서 오는 불안감이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불안과 답답함은 내 모든 감정을 집어삼키고, 신체적인 무기력함까지 불러왔다.
아주 오랜 시간 조금씩 조금씩 축적되어 온 업무에 대한 거부감은
작년에 이어 올해 또다시 터진 이슈로 인해 증폭되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주기적으로 나의 삶을 뒤흔드는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선뜻 결정하기 쉽지 않았지만,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판단했고, 큰 마음을 먹고 정신의학과를 찾았다.
솔직히 말해, TV 속에서 본 것처럼 따뜻한 분위기의 의사와 “충분히 힘드셨겠어요” 같은 공감을 기대했다.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온화한 분위기의 병원도, 내 말에 깊이 공감해 주는 의사도 없었다.
일상에 지친 듯한, 나와 비슷한 연배의 의사는 몇 번 주기적으로 끄덕이며 한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내 증상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조곤조곤 마음을 내보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병원에서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냐니…'

되묻고 싶었다.
'무엇을 도와줄 수 있나요?'
하지만 다시 힘을 내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느끼는 이런 불안감이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지극히 정상적인 수준이라면, 감내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전문가의 눈에 제가 지나치게 예민한 상태로 보인다면, 방안을 제시해 주세요."

가벼운 몇 가지 테스트가 진행되었고,
의사는 내 불안 수치가 꽤 높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안정제를 처방하겠다고 말했다.

“많은 중간 관리자들이 경험하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지나고 나면 괜찮아질 수도 있겠지만,
원치 않는 일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주기적으로 본인을 괴롭힌다면,
약이 일시적인 도움은 줄 수 있어도, 결국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같네요.”

안정제를 손에 쥐고 병원을 나서며 생각했다.

결국, 문제는 ‘나’가 아니라 ‘일’에 있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잘못처럼 반복되는 소모전.
불안감을 동력 삼아 살 순 없지 않은가?
아마 답은 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약을 먹진 않을 것 같다.

결국 내 불안을 잠재울 건 약이 아니라, 내 결심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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