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넘게 같은 회사에서 버텨온 동료들과 오랜만에 모였다.
한때는 한 팀으로 붙어 다니던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각자 다른 팀으로 흩어져 다른 상사와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처지다.
오랜만의 1박 2일 여행.
밤은 깊어가고, 안주가 떨어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그때 그 시절'이 안주를 대신한다.
"야, 그때 오 부장 기억나냐? 진짜 독했는데."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양반은 천사야, 천사."
짧은 추억팔이가 지나가면, 화제는 자연스레 현재로 흘러간다.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가'의 영역으로.
최근 팀을 옮긴 김 과장이 땅이 꺼지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진짜 미치겠어요. 팀장이 너무 우유부단해서 결정을 안 해요. 오죽하면 별명이 '보시조'라니까요."
"보시조? 뭐야, 새 이름 같네?"
우리가 웃자, 김 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새면 차라리 귀엽죠. '보시조'가 아니라 '보시죠'에요.
무슨 안건을 가져가든, 설명을 아무리 해도 마지막엔 딱 한 마디.
'한번 보시죠.'
언제까지 보겠다는 건지, 본 다음엔 뭘 하겠다는 건지... 아무 말도 없어요."
"아…" 하고 탄식이 돌았다.
그 말투가 어떤 느낌인지, 굳이 겪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었다.
보는 척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
결정을 끝없이 미루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를 지치게 만드는 사람.
그때 김 부장이 말없이 듣고 있다가 슬쩍 끼어들었다.
"보시조? 우리 팀장은 '다시조'야."
"다시조?"
"문서 들고 가서 설명하면 딱 한마디 하지.
'다시줘.'
뭐가 틀렸는지 말도 안 해. 그냥 '다시줘.'
고쳐 가면 또 '다시.'
다시, 다시, 다시…"
여기까지만 들어도 답답했는데, 다음 말이 분위기를 싸하게 했다.
"근데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잘했다고 끝내.
드디어 통과인가 싶잖아?
근데 나중에 보니까, 이미 보고를 다 끝냈더라고.
그러니까... 내 문서로 본인은 일 다 끝내놓고, 나는 계속 다시를 반복한 거지."
순간, 테이블 위의 공기가 잠깐 멈췄다.
회사 배경 드라마 속의 악역들이 괜히 실감 나는 게 아니었다.
그러고는 술자리가 순식간에 토론장이 됐다.
주제는 '보시조와 다시조, 누가 더 최악인가'.
"그래도 '다시조'가 낫지 않아? 어쨌든 끝은 있잖아.
'보시조'는 희망 고문이야. 끝이 안 나."
"아니지. '다시조'는 인격 모독에 절도까지 추가야.
차라리 무능한 게 나아. 사람 쥐어짜서 자기 성과 챙기는 건 악질이지."
"근데 '다시조'는 욕이라도 할 수 있잖아.
'보시조'는 뭐라 할 포인트가 없어. 그냥 보고 있다는데 어떻게 화를 내."
어느 쪽이 더 나쁜지 결국 결론은 나지 않았다.
아마 애초에 결론이 필요 없는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다음 날, 숙취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우리는 각자의 숲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누군가는 '보시조'가 기다리는 자리로,
누군가는 '다시조'가 버티고 있는 자리로.
별 것 아닌 수다였지만, 하룻밤 사이 쌓인 마음의 먼지가 조금은 털린 것 같았다.
월요일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우리는 또 각자의 자리에서 어김없이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