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서 나를 본다.

by 곱게자란아빠

아이를 키우다 보면, 문득 아이의 행동 속에서 나를 보게 될 때가 있다.

특히 내가 숨기고 싶은 성격, 오래전에 고쳐보려고 애썼던 습관 같은 것들이 아이에게서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조금 당황스럽고, 조금 민망하고, 또 조금 마음이 쓰인다.


나는 누군가에게 서운한 일이 생기면 말을 잘하지 않는다.

바로 풀 수 있는 일이어도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방식으로 불만을 표현하곤 한다.

“캘빈 인지 잠바 안 사준다고 말을 안 해, 말을...”

예민한 사춘기 시절 나의 이런 묵언 수행으로 고생한 엄마는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그 기억을 소환해 며느리와 손자들 앞에서 흉을 보시곤 한다.

이런 무언의 시위는 눈치가 빠른 사람 앞에서는 그럭저럭 통했다.

내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금방 읽고 먼저 사과해 주니까.


하지만 눈치가 없거나, 그냥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넘기는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 침묵은 길어지고 답답함은 쌓이고,

원래는 작은 일이었던 것이 어느새 커다란 감정의 골이 되어버린다.

이런 방식이 결국 나만 더 힘들게 한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나이가 필요했다.


얼마 전, 둘째 아들이 이런 얘기를 꺼냈다.

친한 친구에게 섭섭한 일이 있어서 한 달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달쯤 지나서 친구가 “미안”이라고 말했고, 그제야 다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들, 사실 친구에게 느낀 섭섭함은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아. 그 뒤로 남는 건 ‘사과해야 해’, ‘사과받아야 해’ 같은 오기 같은 거야.

상대가 빨리 사과해 주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서로 괜히 힘들어지는데, 그럴 바엔 처음에 바로 마음을 꺼내놓는 게 훨씬 가볍고, 빨리 끝나는 일 아닐까?”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큰아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처음 말하기엔 너무 작은 일이라... 따지기도 좀 그렇고, 근데 그냥 넘기기엔 기분이 나빠서... 그래서 말을 안 하게 되는 거야.”


'아, 그랬지.'

나도 그랬다.

화를 내기엔 사소하고, 그렇다고 모른 척 넘기기엔 은근히 손해 본 것 같은 상황.

아이에게 나의 시행착오를 담아 무언가 큰 깨달음을 전해주고 싶었는데, 말은 생각보다 쉽게 길을 잃었다.


아들은 잠시 나를 보더니, 기대했던 조언이 나오지 않자 시큰둥하게 한마디를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져.”


그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그 시간 속에서 서운함을 어떻게 다루는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아주 천천히 배우게 되겠지.


아들이 조금 덜 다치고 빨리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스스로 상처 나면서 단단해지는 과정도 필요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 역시, 수십 년 전의 나처럼 입을 다무는 아들을 경험하면서 뒤늦은 반성과 사과를 엄마에게 전할 수 있겠다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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