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by 곱게자란아빠

90년대 후반, 나는 군대에서 상황병으로 복무했다.

컴퓨터를 전공했다는 이유 하나로 끌려간 곳이 상황실이었다.

부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누구보다 먼저 알고,

그보다 더 빨리 상급부대에 보고해야 하는 자리.

그래서 필요한 건 판단력도 체력도 아니었다.

빠른 한메타자.

컴공 전공자를 뽑은 이유는 딱 그거였다.


상황병 근무는 낮, 밤 2교대였다.

당연히 낮은 고참의 몫, 밤은 신참의 몫.

새벽녘 상황실에는 별의별 사건들이 전화와 팩스로 쏟아졌다.


"어촌 해안가에 오리발 한 짝이 발견되었습니다."

"정체 모를 불빛이 바다 쪽에서 접근 중이라는 보고입니다."


보고 양식에 맞춰 전달된 내용을 타이핑하다 보면,

문득 엉뚱한 생각이 스친다.

'오리발 한 짝이… 진짜 간첩의 것일까?

여긴 남부 해안인데, 오리발로 여기까지 온다고?'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하지만

손가락은 기계처럼 키보드를 두드린다.

오타를 고치고 정렬까지 마친 보고서는

상황실장의 검토를 거쳐 팩스실로 넘어간다.


상급부대로 보내기 직전,

팩스실에 다시 새로운 상황이 도착한다.

"오리발, 인근 해녀의 것으로 결론."

"상황 종료."


늘 이런 해프닝들들 사이를 헤치고 나오면 어느새 아침이 된다.

지쳐버린 심신은 빨리 잠들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당직 장교들이 퇴근하고,

새로 출근한 상황실 장교들 중 실장이 나를 부른다.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며 말한다.


"자판기 커피."


쟁반과 천 원을 들고 복도 끝 자판기로 간다.

밀크커피 다섯 잔, 율무차 한 잔.

한 잔에 150원이니 거스름돈은 100원.


컵 여섯 개를 실장님 책상 위에 올려두면

그는 율무차와 밀크커피를

아주 조심스럽게 반씩 섞는다.

그렇게 완성된 한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자연스럽게 거스름돈 100원을 챙긴다.


나는 남은 커피들을 쟁반에 담아 다른 장교들에게 나눠준다.

아무도 손대지 않고 남은 마지막 한 잔.

실장이 반반 섞어버린,

이름조차 애매한 '밀크율무'

그게 늘 내 몫이었다.


그렇게 나는 2년 동안,

매일 아침 9시

빠짐없이 밀크율무를 마셨다.


밀크율무에 슬슬 질릴 즈음 제대를 했다.

복학을 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이 찾아왔다.

2년 만에 공부를 다시 시작해서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두통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군 시절의 아침과 하나씩 비교해 봤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스친 단어 하나.


'밀크율무'


설마.. 싶어 그 시간에 맞춰 믹스커피를 한 잔 마셨다.

머리를 조이던 통증이 슬그머니 풀렸다.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군대에서 끝난 줄 알았던 아침이

따라와 있었던 거다.


그날 이후,

내 하루는 늘 같은 방식으로 시작됐다.

눈을 뜨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커피부터 찾는 아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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