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도 괜찮아, 제주가 말했다
연초에 제주도 비행기표를 예매해 두었다.
마일리지가 곧 소멸된다는 알림을 보고, 별생각 없이 12월 말 비행기를 결제했다.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여행을 갈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 쓰겠지’ 싶은 티켓 하나였다.
여행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 건
항공사로부터 출발 시간이 변경됐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였다.
그제야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끊고, 숙소도 예약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들은 방학이 아니었고,
아내도 다른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는 말이 나왔지만
딱히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냥, 잊고 있었다.
여행 전날까지도 아무 준비를 하지 않았다.
원래의 나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늘 계획표를 만들고,
체크리스트를 적고,
밑줄을 그어가며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시간도 체력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느슨해져 있었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에 가까웠다.
여행 당일 새벽,
아이들을 깨우고 백팩을 하나씩 쥐여주며 말했다.
"3박 4일이야. 너희 필요한 건 알아서 챙겨봐."
나 역시 생각나는 것만 캐리어에 담았다.
준비에 대한 집착을 조금 내려놓았다고 해야 할까.
회사 출근 게이트를 통과할 시간에 공항 출국 게이트를 통과하니
이게 여행인지, 출근인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등교 가방을 메고 앞서 가는 아들 역시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집이랑 제주도 중에 뭐가 좋아?"
"학원 없으면 집!"
조건부 대답이었지만
이번 여행에 큰 설렘이 없다는 건 분명했다.
"아빠도, 회사만 안 간다면 집이다."
사실 우리 모두 이 여행에 큰 기대가 없었다.
렌터카를 빌리고도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시동을 걸자마자
미리 생각해 둔 주요 관광지를 입력했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는 말에
뭘 먹을지 한참을 이야기했고
근처 식당을 찾았다.
방문해야 할 맛집 리스트도 없었다.
여유 있게 밥을 먹고 나서야 숙소를 입력했다.
그마저도 네비의 경로를 따를 생각은 없었다.
아내는 지도를 보고,
아이들은 표지판을 읽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누구도 잘 모르는 곳에서
아무 기대 없이 마주친 풍경들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늘 미리 찾아보고,
사진으로 다 본 장면을 설명하느라 바빴던 여행과는 달랐다.
이번엔 나도 처음 보는 장면을
아이들과 동시에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이 따라왔다.
나는 자꾸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업무 메신저,
확인해야 할 메시지.
그걸 보며 한숨을 쉬는 나를 보고
아내가 말했다.
"휴가인데도 일을 시키는 사람이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당신 없어도 다 돌아가요. 진짜 급하면 전화 오겠죠."
맞는 말이었다.
내가 여기서 메신저를 본다고
해결되는 건 거의 없었다.
결국 회사에 있는 사람들이 처리할 일이다.
그걸 알면서도
손이 휴대폰으로 가는 건
일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계속 따라온 불편한 마음은
이렇게 쉬어도 되나 하는 마음이었다.
둘째 날 아침,
호텔을 나서며 휴대폰을 방에 두고 나왔다.
한 번쯤은 그래보고 싶었다.
휴가를 와서도 늘 일과 완전히 분리되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작은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근거 없는 책임감을 내려놓는 연습.
밤늦게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
부재중 전화는 하나도 없었다.
나를 찾는 업무 메신저도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구나.'
셋째 날 아침,
눈이 내렸다.
호텔 발코니에 앉아 내리는 눈을 한참 바라봤다.
턱 밑까지 차 있던
무언가가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 불편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빠, 되게 편해 보이는데."
"당신 이제야 휴가 온 표정이네. 어제까지는 잔뜩 인상 쓰더니."
가족들의 핀잔에도 괜히 웃음이 났다.
'이게 쉬는 거구나.'
이번 휴가는
특별히 어디를 많이 보지도 않았고
뭘 대단히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이나 되뇌며 기억할 것 같다.
편안했던 쉼이었다고.
돌아가는 공항에서
우리 부자는 서로에게 물었다.
"학원 없는 집 대 제주도?"
"전 제주도요. 너무 돌아가기 싫어요"
"아빠도 돌아가기 싫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휴가였다 말할 수 있겠다.
적어도,
쉬어도 괜찮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됐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