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는 칸을 메우는 마음
일주일 넘게 몸이 가라앉아 있다.
가끔은 내 의지보다
몸의 파업이 더 완강할 때가 있다.
주말 아침,
겨우 몸을 일으켜 동네 병원을 다녀왔다.
약 봉투에 담긴 알약 몇 알에 남은 주말의 평온을 걸어본다.
약 기운 때문일까.
소파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였다 떴는데
시계 바늘은 벌써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다.
거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은
이미 길게 늘어져 퇴근 준비를 한다.
주말의 시간은 늘 이렇게 속도를 낸다.
거실 창 너머 학교 운동장에는
이 추위에도 트랙을 도는 사람들이 보인다.
누군가는 달리고, 누군가는 걷는다.
2월의 공기는 여전히 칼칼한데,
그들은 무엇을 향해 저토록 부지런히 움직이는 걸까.
나는 그 장면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본다.
새해 벽두에 세웠던 계획들은
이미 '작심삼일'이라는 이름표조차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희미해졌다.
책상 위에 놓인 다이어리를 펼친다.
어제와 그제의 칸이 하얗게 비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은 아이처럼,
기억을 더듬어 지난 일들을 적어 내려간다.
'회의 참석', '자료 정리'
남들이 보기엔 계획대로 착실히 살고 있는
사람의 일상처럼 보이도록 칸을 메운다.
하지만 다이어리의 칸을 채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칸'이 기다리고 있다.
2월은 업무 목표를 수립하는 달이다.
나 자신의 1년도 가늠하기 힘든데,
부서원들의 1년치 목표를 고민하고 승인해야 한다.
세상은 온통 AI를 말한다.
지난주 참석했던 모든 회의의 마침표는 AI였다.
흐름을 타야 한다는 건 머리가 먼저 알지만,
약 기운에 젖은 몸은 자꾸만 소파 밑으로 침잠한다.
문득 생각한다.
오랜 시간 이 속도감 속에 몸을 던져왔는데,
왜 여전히 목표를 세우는 일은
낯설고 변화는 버거운 것일까.
아마도 우리는 '앞으로 가야 할 길'에만 매달린 나머지,
지금 딛고 있는 오늘의 무게를
종종 건너뛰어 왔는지도 모른다.
다음 주만 버티면 설 연휴다.
연휴가 지나면 느슨했던 회사의 시계태엽도
다시 팽팽하게 감길 것이다.
AI 교육을 받고 싶다며
눈을 반짝이던 후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의 속도에 맞춰 함께 달려주기 위해서라도,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거창한 업무 목표가 아니라
처방받은 약을 제때 챙겨 먹고
비어 있는 다이어리의 다음 칸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오늘의 몸 상태를 무시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일.
지금의 나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4시의 기우는 햇살 속에서 조용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