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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내자 Feb 12. 2023

아무렴 어때?

남편의 작은 위로




큰애의 글쓰기 시간에 큰애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이 글을 썼다.

큰애가 정한 글쓰기의 주제는 '만약 내가 우리 집 가구가 된다면(물건이 된다면)'.


제일 먼저 엄마인 나에게 달려와 책을 건넸다.


"엄마, 엄마가 우리 집에 있는 물건 중에 되고 싶은 게 뭔지 적어봐. 알았지?"


아, 내 글쓰기도 바빠 죽겠는데 네 글쓰기까지 내가 해야 하니 싶었지만 간만에 글쓰기 과제에서 해방된 아이의 안달 난 모습을 보자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고민하고 말 것도 없이 눈앞에 책이 보여서 책이 되고 싶다고 글을 썼다.



나는 책이 되고 싶은데 나를 만져주지도 않고 봐주지 않으면 외로울 것 같아. 나를 좀 봐달라고 애원하고 싶은데 책은 움직일 수 없잖아. 먼지만 수북하게 쌓이겠지만 가치를 잃지 않고 계속 기다려보겠어. 책을 좋아하는 정후라서 언젠가는 나를 한 번쯤 후루룩 펼쳐봐줄 것 같거든. 가끔 한 번씩 나를 좀 봐줄래? 표지만이라도 쓰다듬어주고 제목을 읽어봐주렴. 나는 언제나 늘 같은 곳에 있을테니까!



책의 입장에서 글을 써 내려가다가 책에게 심하게 감정 이입을 해서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 지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나한테 하는 이야기나 다름없어서 좀 찔렸다.




딸은 피아노가 되고 싶다고 했다. 변덕이 심하고 취향이 확실해 고집이 센 딸이 오랜 기간 동안 지겨워하지 않고 꾸준히 배우고 있는 것이 피아노인데 아니나 다를까 피아노가 되어 최대한 가까이에서 음악을 듣고 싶다고 한다.



나는 피아노가 되보고 싶어. 피아노가 되면 아름다운 음악을 다른 사람이 피아노를 칠 때 내가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잖아? 아, 물론 피아노치는 사람이 피아노를 굉장히 못친다면 예외지. 그래도 나는 음악을 좋아하니까!



피아노를 배웠으면 실력이 늘어야 하는데 왜 자꾸 틀리냐고 뭐라 했던 친정엄마의 모습이 떠올라서 나는 딸이 피아노를 칠 때 지적하지 않는다. 무엇을 두드리던지 멋지고 듣기 좋다고 말해준다.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 통했을까? 아이의 마지막 문장이 와닿는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니까!"




남편 차례가 되었다.

책과 펜을 건네받은 남편의 성이 들려왔다.


"아악! 이걸 왜 하라고 하는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아빠에게 얼른 쓰라고 재촉을 했고 남편은 자세를 바로 잡으며 기다리라고 말했다.

남편의 글쓰기가 끝나고 아이는 푸하하 웃기 시작했다.


"아빠는 이불이 되고 싶어요? 푸하하하!!"



나는 이불이 되고 싶어.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 하고 잠이 든 너를 포근히 감싸고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위로하고, 내일도 행복하자고 응원하고 싶어. 민망한 상상에 날 걷어차는 일도 있을테고 너무 슬퍼 울고 싶을 때 날 덮고 훌쩍 거릴때도 있겠지. 발 냄새 맡아가며, 눈물자국 말려가며 아무렴 어때? 너의 하루의 마지막을 감싸 안아 줄 수 있다면 난 그걸로 좋아.



평소 피로 누적으로 이불과 친한 남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글이라 아이들 눈에는 재미있게 보였던 모양이다.

나도 처음엔 '으이그, 이 인간이 많고 많은 물건 중에 이불을 골랐네. 저 화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곰탱이 같은 큰 손으로 꾹꾹 눌러 담은 그의 마음이 느껴져 애잔해졌다.


하루하루 커가는 아이의 일상이 전투같이 치열해질 것이고 그로 인해 너의 삶도 고단해질 것임을, 좌절과 실패 속에서 마음 아파 눈물 지을 날들도 수없이 많을 아이의 미래를 아빠는 하루의 마무리에 늘 함께하는 이불이 되어 걱정해주고 있었다.


'아무렴 어때'


너의 실패와 좌절과 눈물을 아빠는 언제든 받아줄 것이고 어깨를 빌려줄 수 있다고 말하는 아빠의 마음을 아들은 눈치챘을까?

곰탱이 같은 아빠가 세상 든든한 샌드백이 되어줄거라는 믿음을 아이가 가졌으면 좋겠다.


괜시리 글에서 느껴지는 그의 삶 또한 고단한 것 같아 눈물이 난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짊어지고 있는 책임감이 그를 짓누를 때면 그도 이불 속에서 잠시 내려놓고 쉬는 거겠지.

나도 그가 힘들어할 때 슬며시 손 잡아주며 말해주고 싶다.


"여보, 아무렴 어때."


표현하지 않는 그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이 글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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