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생 첫째
“애어른이다. 이런 아이 없다.” 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똑똑한 삐약이가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몰랐다.
똑똑한 삐약이는 알아서 잘 하는 첫째 병아리 아롱이다.
2007.02.13. 3.02kg. 49cm.
이 아이를 만나기까지 두 아이와 헤어짐을 겪고 만났다. 열달을 품고 있는 동안에 입원도 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열달을 채우고 만난 아이. 나의 첫째. 우리의 첫째 아이다.
똑똑한 삐약이는 가장 약하게 태어났다. 사실 수치로는 그리 작은 아이는 아니였지만 포동포동이라는 말보다는 피부껍질이 붙어 있구나 싶은 아이었다. 정말 새빨간 신생아 아이었고 머리는 까만 꽤나 이쁜 얼굴이었다.
퇴원을 하려던 날.
그러니까 태어난 지 3일만에 여수에서는 안되겠다며 엠블란스를 불러 광주 대학병원으로 갔다. 병명은 선천성 심장기형인데 의사들은 늘 그렇듯 가장 위험한 순간을 이야기 해주면서 입원을 권했다. 덕분에 나는 애를 낳은지 3일째에 몸조리을 위한 편안한 휴식은 커녕 엠블란스를 타고 여수에서 광주로 가서 아이만 덜렁 중환자실에 입원시키고 다시 광주에서 여수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만 보고 그 다음날 바로 화천 부대로 복귀했던 남편은 고속도로를 과속에만 안 걸리게 얼마나 밟고 왔는지 강원도 화천에서 전라도 여수까지 4시간도 안 걸려서 왔다. (세 아이 모두 태어난 곳은 같은 병원 같은 선생님이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광주로 갔고 아이 상태만 보고 또 내려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고 특별하게 해 줄게 없다며 아이는 퇴원을 했고 제대로 된 모유를 그제서야 먹일 수 있었다. 아이가 없는 동안 모유는 차곡차곡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었고 그럴때마다 흐르는 눈물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삐약이는 모이도 스스로 먹는 게 힘들어서 언제나 땀을 뻘뻘 흘렀다. 무지한 암탉은 건강해져야 한다며 물과 모이를 시도때도 없이 열심히 먹었다.
여수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덕에 신생아 예방접종을 하게 된 병원 원장선생님께서 너무 귀한 정보를 주셔서 아이는 매달 심장초음파를 무료로 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아이와 나는 100일 가까이를 여수에서 지냈고 이후에도 비행기를 타고 여수를 두달에 한번꼴로 왔다갔다 했다. 검사를 받으러 가보면 아이들이 젖을 빨 힘도 없는게 당연한거라 대부분 젖병에 분유를 먹이는데 무지했던 나는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겠다는 생각 하나로 서로가 힘들어 했던 시기다. 아이가 빠는 힘이 없으니 내 가슴은 늘 돌덩어리였고 그 고통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 덕분에 태어난 지 일년도 되지 않아 아이의 심장에 있던 구멍은 스스로 막혔다. 더 지켜보지 않아도 되어서 기뻤지만 초등학교 때 머리에 초미세종양이 발견되고 이로 인해 또 다시 병원을 주기적으로 찾아야 할 때는 아이도 지쳤고 우리는 그 이후로 병원이 참 싫어졌다.
그렇게 무엇이든 항상 처음을 경험하게 해 주는 똑똑한 삐약이는 그 처음 덕분에 힘들었지만, 암탉은 처음이 언제나 감격스러웠고 고맙고 미안했다.
그런 똑똑한 삐약이가 언제부터인가 암탉처럼 되었다. 몸은 아직 병아리지만 마음은 엄마보다 더 큰 암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부모화되어 가는 아이를 모른척 하고 오히려 그걸 칭찬했던 무지가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 오히려 서운하다며 나를 무시한다며 쌈닭처럼 들이밀다가 끝내 울었다. 외면한다고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첫째 삐약이의 독립연습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 둘은 더더욱 격렬하게 부딪혔고 멀어졌고 서로에게 상처를 가득 남기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덧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한다고 할 때도 우리는 아이의 의견을 존중했다. 자퇴를 한 아이와 둘이 떠난 일본 여행으로 우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온전히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고 조금씩 다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역시나 그렇듯 스스로 학습을 너무 잘 해 주고 있다. 나도 저렇게는 못할텐데.. 라며 아이가 스스로 커가는 것을 대견해하며 응원한다. 둘이 영화도 보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나에게 이야기도 하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을 때는 상담자로서 나에게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그렇게 오늘도 애쓰는 중이다.
오늘도 눈물을 숨기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이제 그 미소 뒤에 쌓인 내가 세 아이를 낳고 키우며 지금을 살아온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