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엽 어쩌고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계절성 우울 증후군 1

by 하란

계절성 우울 증후군

우울이 가을처럼 깊어져, 드디어 병원을 갔다.

아니면

우울이 뜬금없이 찾아와 갑자기 병원을 갔다.

사실 둘 다 맞지 않을 수도 둘 다 맞을 수도 있겠다. 사소한 것들이 천천히 쌓여 왔으나, 이럴 정도는 아닌데, 라는 것이 지금의 정확한 상태이니.

어쨌든, 그동안의 나의 우울과는 다르게 획기적인 사건이나 계기가 없었다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아파 죽기 직전이 되어야 병원을 찾는 나에게 병원을 찾게 한 것이다.

딱히 생각나는 힘든 일이 없는데, 오히려 지금 꽤 괜찮은 때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어제는 너무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건만, 아침의 무기력과 우울은 나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딸아이를 보내고 잠시 공황 상태에 빠져있다 외출 준비를 하고 고3 이건만 학교에 가지 않고(결단코 내 우울의 원인이 아니다!) 잠을 자고 있는 아들방으로 가 19년 만에 처음으로

-아들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지? (우울증이 확실하다!!)

라고 듣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 얘기를 하곤 근처 신경정신과로 향했다.

오래된 '신'도시의 병원 답지 않게 깔끔해서 조금 기분이 좋아진다.

이 오래된 신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다행히 건강한지 손님이 없어 접수를 마치고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오! 의사 선생님이 미남까진 아니지만 꽤나 호감형이라 바로 또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진다.

'이거 이제 진료를 안 받아도 되는 것 아닌가?'

다소 건조한 말투로 의례적인 질문들이 이어진다. 다시 좀 우울해진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으셨나요?

-네, 그런데 그땐 힘든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딱히 그런 일이 없는데 이래서 걱정이 돼서요

(꽤나 심드렁하게)

-감기처럼 그냥 오기도 해요.

다시 이어지는 의례적인 질문들.

-술은 얼마나 드시나요?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하나 하는 잠시 잠깐의 망설임 끝에, 정확한 진단을 위해 사실대로 이야기한다.

-횟수는 주 4회 정도...(사실은 5~6회)

모니터만 바라보며 건조하게 질문을 던지던 의사가 처음으로 나를 바라본다.

-한 번 드실 때 양은요?

-혼자 마실 땐 소주 반 병에서 한 병정 도고, 술자리가 있을 땐 자리가 끝날 때 까진 마시는 것 같아요.

다시 한번 모니터를 응시하던 눈빛이 나에게 향한다.

-술을 줄이셔야 해요. 그 정도 드시면 알코올 중독에 의한 전두엽 손상으로 감정조절이 안 되는 걸 수도 있어요.

뭐시라? 전두엽이 어쩌고 알코올이 어째?! 이 의사가!

-알코올 중독은 술을 안마실 때 참지 못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라는 소심한 항변

-그렇지 않습니다. 매주 2회 이상 음주를 한다면 알코올 중독으로 봐야 합니다.

이후 수면에 대한 질문, 아침에는 우울증 약 저녁에는 수면에 관계된 약을 처방해 주겠다는 말과 함께

혼술은 하지 말 것과, 술을 줄일 것, 술자리가 있으면 소주 반 병 정도를 권한다는 당부에 당부가 이어진다.

반 병? 반벼엉?! 내 음주 인생에 소주 반 병이 존재했나?

저 오래된 신도시의 깔끔한 병원의 꽤 괜찮게 생긴 의사는 확신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전두엽 손상에 따른 감정조절에 문제가 생긴 환자로!‘

젠장 CT라도 찍었으면 이리 억울하진 않지.

다시 이어지는 소심한 항변

-제가 진짜 술 마시는 걸(술자리가 아니고) 순수하게 좋아하는데, 요샌 그것도 시들해서(오히려 그게 문제 아닐까요)...

-술자리(술자리가 아니라요!)가 재밌고 좋은 건 20대 때나 하는 거지, 지금 나이에(지금 나이?!, 내 나이가 어때서~, 술 마시기 딱 좋은 나인데)에 좋은 게 병이에요.

KO패!

약을 받아 들고 병원을 나왔다.

우울함에 수치심과 짜증이 플러스되었다.

아, 도저히 알콜에 의한 전두엽 손상에 따른 감정조절 문제로는 나의 우울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병원을 나서니 눈에 들어오는 파란 하늘과 노란 낙엽, 슬프도록 아름다운 가을 풍경과 손끝이 시린 날씨

그래 계절의 문제가 분명하다.

나는 단지 '계절성 우울 증후군'일뿐!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한다.

-OO아, 누나야~ 낮술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