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에게 전화를 해, 취했지만 취해서만은 아니야

.계절성 우울증 5

by 하란

외롭다.

나의 외로움은 꽤나 근원적인 것이기에 단순히 연애를 한다거나 (연애를 지속하는 동안의 효과는 꽤나 크지만, 이젠 연애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연애를 한다거나, 연애를 한다고 해서 해결되진 않는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를 음식으로 달래듯, 외로울 때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효과 빠른 두통약만큼이나 빠른 효과와 짧은 지속시간을 가진다.

이번의 우울은 사람으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가장 먼저 사람 만나는 걸 줄였다. 그러다 보니 진통제를 먹지 못한 나의 외로움통은 커지고 커지다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어찌 보면 결괏값이 뻔하디 뻔할 끝을 알면서도 요즘의 내가 두려움 없이 가장 편하게 연락을 할 수 있는 지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연락이 없어 나가서 혼술이라도 때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즈음 온 콜백에 한걸음에 달려 나간다.

빠르게 늘어놓은 주절거림만큼이나(지겨울 법도 한데 들어줘서 고마워, 그래서 내가 계산하잖니) 빠르게 때려 넣은 술로 2시간이 조금 넘자 더는 안 되겠다는 1차 경고등이 켜졌다.

그때까진 정신이 있었는지, 호기롭게 빠이빠이를 하고 집으로 향하던 길, 남아있던 취기가 퍼져 만취에 이르렀고, 망할 놈의 외로움은 핸드폰 잠금을 해제했다. 익숙함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오락가락하는 스치는 기억의 시간들. 무서운 익숙함은 다행히도 집으로 날 보내주는 친절을 베푼 듯하다.

아침에 무거운 머리를 흔들고 일어나, 두려운 마음으로 핸드폰을 열고 통화기록을 확인해 본다.

죽자. 그냥.

조금만 가면 을왕리 앞바다도 있고, 인천대교도 있단다.

거기까지도 갈 기력도 염치도 남아 있지 않아 다행히 또 한 번 이렇게 목숨을 연명한다.


필름이 끊기는 것도, 가끔은 자빠져 무릎이 깨지는 것도, 콤플렉스인 작은 눈이 싫어 아예 없애버리려 울어재끼는 것도 그래도, 그래도 괜찮은데(오래된 신도시의 깔끔한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또 한 번 알콜성 전두엽 손상을 확신하시겠지만) 여기저기 전화를 해대는 것만은 정말이지 접시물에 확 코를 박고 죽고 싶을 만큼의 후회를 동반한 쪽팔림을 준다.

그나마,

의사 선생님의 말씀대로(지금 생각하니 명의 중의 명의일 수도 있겠다 싶다) 젊을 때는

그나마,

괜찮겠지만, 지금의 내 나이엔 그야말로 병이다.

심지어,

전화번호부에 기록된 모든 번호에 전화를 할 뻔한(그래서 주기적으로 전화번호부를 리셋한다) 근면함을 갖춘 ‘나’

심지어!

술이 취해 전화를 할까 두려워 지워버린 전화번호를 제삼자에게 전화를 해 알아내 전화를 하는 성의를 갖춘 ‘나’

심지어!!

대화가 잘 통해 우울증이 찾아오고 나서부터 문득문득 만나고 싶다고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에게 기어이 전화를 하는 집념까지 갖춘 ‘나’이다.


그날 하루는 숙취와 숙취보다 더한 후회의 괴로움으로 우울을 살필 여력도 없었다.

이것도 한 방법 아닐까? 매일 이렇게 쓰레기처럼 부끄러움에 허우적거리다 보면 우울증은 낫지 않을까?

하지만 쓰레기보단, 우울한 내가 남들 보기 좀 덜 창피하리라.

그렇게 자숙과 자책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하루 이틀을 보내고 나니, 한층 더 깊어진 우울과 외로움이 다시 나를 찾는다.

-역시 나밖에 없지?


이젠 다 모르겠다 생각하고 그저 우울에게 나를 내맡긴 채 될 대로 되라지라고 생각하고 내 안의 깊은 동굴 속으로 파고들어 가고 있을 무렵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아마도 SNS에서 자취를 감춘 나의 이상을 감지하고 살피려는 예쁜 마음일 것이다.

섬에 있는 오래된 신도시에서 새로 생긴 신도시로 버스를 타고 간다.

이곳에서 예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 ‘섬’(술집)으로 갈 것이다.


오늘은 만취하지 말길.

오늘은 휴대폰을 잠금해제 하지 말길.

오늘은 예쁜 마음만 나누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길.

혹시나 내가 취하면 날 집으로 실어다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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