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지향과 애정결핍

계절성 우울 증후군 8

by 하란

세 번째 병원을 다녀왔다.

사실, 지난 번 다녀오고 결국은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싶어 안가려고 맘 먹었었는데, 예약문자를 보자 아직은 조금 더 약의 도움을 받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은 지난번과 똑같이 처방을 받기로 했다.

최소한 의사가 보기에 더 나빠지진 않았나 보다.

약간은 안심도 되고, 역시나 병원은 큰 해결책이 못 되는 구나 하는 실망감도 든다.

약간 살얼음장 같은 날들이 계속됐다.

괜찮은 듯 하다가 약간의 자극(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어야 할)에도 뚝이 툭하고 터져 쏟아지는 눈물비와 함께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는 다시 올라와 살얼음장 같은 얇디얇은 평온 위에서 잠시 쉬기를 반복하고 있다.


-어떤 일들이 자극이 되세요.

-사람 만나는 거...(그 외의 것들도 있지만 뭔가 말하기는 좀, 그랬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너무 관계지향적인 성향이셔서 그래요. 예를 들어 ‘저는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 행복해요. 는 쉽지만 ‘저는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속 깊은 얘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는 게 행복해요.’라고 하면 힘들어지거든요.


맞기도 틀리기도.

나는 전자도 후자도 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한동안은 사람을 만나지 마세요.


라는 의사선생님의 단호한 마지막 말씀에(이미 약속이 주르르륵 잡혀 있지만, 잡힌 건 어쩔 수 없잖나)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병원을 나오며 커피를 마시기로 했던 지인에게 이 얘기를 하곤, 혼자 커피 한 잔 하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일단 술을 좀 줄여봐요.


아, 시러라.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니라, 그냥 시러라에서 끝나는 감정.


-날 어떻게 생각하든 뭔 상관이람.


맞다.

나는 너무 관계지향형이고, 지금의 우울의 가장 큰 원인도 그래서임은 자명하다.

틀리다.

왜 내가 관계지향적인지가 빠졌으니.


원래 타고난 성격이 외향적이라 관계지향인 경우도 있겠지만, 관계지향인 사람 중 애정결핍이 원인인 경우도 꽤 된다고 생각하고 나 또한 그러하다.

나는 최소한 대학을 입학하기 전까지 무척이나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진 않았지만, 그만큼의 크기로 혼자 책을 읽고 나만의 공간에서 공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고, 친구가 없진 않았지만 많은 친구보단 1~2명 정도의 친한 친구들과만 어울렸다.


애정결핍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진부하게도) 나 또한 어린시절 꼭 필요한 부모로부터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부재가 그 원인이다.

고등학교때까진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단 생각에 무력함과 포기가 적절히 날 이끌고 갔다면, 애정결핍의 대부분이 그러하듯(너무도 진부하다) 이성관계를 처음 경험하며 어린시절의 결핍을 그 공백을 채울 수 있겠구나하는 착각을 하게 된 듯하다.

-그래 저 사람이라면, 날 사랑해 줄거야

라는.


하지만 어린시절 응당 받았어야할 부모의 애정과 남녀간의 애정은 ‘애정’이라는 단어의 공통만 있을 뿐,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마치 빵은 빵이지만 샌드위치와 케이크가 다르듯이.

가끔 운이 좋겠도 케이크를 먹어도 식사가 되는 사람도 있고 식사가 될만한 담백한 파이같은 사람을 만나 어느 정도의 허기를 채우고 잘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의 연애는 언제나 너무 달디단 케이크에 지나지 않았고, 내가 케이크가 아닌 빵이 필요하단 사실은 깨닫지 못 한채, 그저 어쩌면 그 오래된 허기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만은 자각하곤 또 다른 케이크를 찾아 다녔고, 이번에야 말로 채워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웨딩케이크에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결혼 또한 샌드위치는 아님을 곧 깨달았고, 이젠 케이크를 찾을 수 없는 입장이니 그걸 대체할 만한 스콘이나 쿠키 정도를 갈구했던 것, 그게 나에겐 사람이었고 그 결과 나는 지금의 관계지향적인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태어나며 이미 결정되어 버린, 이미 들어버린 나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외모열등감의 문제처럼 사실 이젠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지만,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면 그 허기를 그 공백을 다신 채우지 못한 채 껴안고 살아야 한다는 서글픔과 조바심이 이 우울을 이끌었을 듯 하다.


이름도 존나게 긴 ‘블루베리 쿠키 치즈 케이크’를 주문한다.

원래 단 걸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건만.

이젠 샌드위치는 바라지도 않는다.

잠시 잠깐의 달콤함으로 깊은 허기를 잠시 잊을 수 있다면 케이크, 스콘, 파이 아니면 쿠키라도 한 입 하고 플 뿐.

다만, 지금의 나는 조금 지쳤다.

이전 07화가을의 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