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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란 Mar 05. 2023

고창 선운사

사찰 여행

겨울, 낭자한 동백꽃도

, 흐드러지는 벚꽃도

여름, 오롯한 배롱꽃도

가을, 지천의 꽃무릇도

모두 비껴간 한 때.

그 어느 것 없어도

이토록 아름답게 피어 머무르는 곳.


사시사철 넘치도록 아름다운 곳인 선운사를 그 모든 순간을 빗겨 난 시기에 다녀왔다.

일주문을 들어서 선운사까지 선운천을 따라 걷는 길은 선운사를 찾는 기쁨 중 일 번으로 꼽을 수 있다.

아직은 찬 기운을 뚫고 꽃무릇이 푸르게 흐드러진 땅 위로 굵은 둥치의 벚꽃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고 낙엽이 오랜 시간 동안 퇴적되어 검은빛을 띤 물 위로 나무그림자가 그린 듯 비쳐든 그 길을 걷노라면 어느새 사색이라는 친구가 조용히 곁에 와 동행을 한다.

그렇게 사색을 하며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이 나온다. 사천왕상의 매서운 눈매에 온갖 속세의 것들을 떨쳐내고 문을 나서면 선운산 자락을 배경으로 넓은 대지에 대웅전, 관음전, 명부전 등 세월의 흔적이 고고하게 빛나는 전각들이 시원하게 들어서 있다.

선운사 곳곳엔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는데, 만세루 왼쪽 옆 꽃을 피우면 그 무게에 가지가 땅에 닿을 듯한 멋들어진 수형의 배롱나무가 눈길을 끈다.

대웅전 앞으로는 고려시대 세워졌다는 원래는 10층이었다는 6층 석탑이 지키듯 서있고 대웅전 뒤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드넓은 동백숲이 사찰을 감싸 안듯 펼쳐져 있다. 대웅전 오른편으로 돌아 산신각으로 앞으로 가 세월을 가늠할 수 없으리 만치 큰 동백나무 군락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저 숲 너머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로 흘러 들어갈 수 있을 듯한 감각의 시차가 느껴진다.

흰 눈 속에서 어느 순간 붉은 꽃을 피워냈다가 또 어느 순간 일라치면 그 모습 그대로 뚝 떨어져, 버리는 동백꽃. 자연의 하는 일을 감히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 선운사에 동백이 흐드러졌다는 기별이 들린다면 생의 어느 순간이라도 만사를 제치고 달려올 일이다.

대웅전 문 앞에서 부처님께 가벼운 목례를 드리고 경내를 산책하듯 천천히 둘러보고는 기념품과 차를 파는 가게로 들어선다.

선운사를 온 건 이번이  번째이다.

25살, 김해에서 사표를 내고 무작정 동에서 서로 향하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

그리고 다시 사표를 물리고 일하기를 10년 즈음 35살에 승진을 앞두고 이런저런 복잡한 맘을 정리하려 찾았던 곳.


그땐 붉디붉은 꽃무릇이 가득한 9월이었지만, 그 고운 빛 하나 마음에 담못하고 그저 심란한 마음으로 사찰을 둘러보다 경전이 새겨진 반지를 하나 사서 지닐까 하는 생각에 기념품을 파는 이곳으로 들어섰었다.

법구경이 빼곡히 새겨진 반지를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이곳에서 자원봉사 하시는 보살님인 듯한 분이 무슨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 내 곁을 서성이다 내게 분홍빛의 팔찌를 권하셨다.

-아니요 전 반지를 사려고요

나의 거절에도 몇 번을 거듭해서 권하시는 모습이 단순한 상술인 것 같진 않아,

-저, 왜 계속 이걸 권하시는지요?

라고 여쭸다.

잠시 망설이시던 보살님은

-보살님, 보살님은 너무 혼자 독야청청하셔서 주변에 사람들이 다가오기가 힘들어요. 이 원석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해주는 기운이 있어서. 보살님이 꼭 지니고 다니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씀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평소 내게 손해가 가더라도 난 옳은 것을 택하겠다는 곧음은 그저 내가 옳다는, 조금이라도 희지 않은 것은 검다는, 세상의 희고 검고 때로는 회색인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오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오만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날 외롭게 만든 건 아닐까 하고..

-보살님, 이 팔찌 때문이 아니고 보살님의 말씀 덕분에 제가 변할 것 같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곤 팔찌를 사들고 나왔다.

그리고 쭉 지니고 다니던 팔찌가 승진 발표가 있는 날 아침 눈을 떠 일어나자 툭하고 끊어져 승진이 안되나 보다 했다가는 승진 소식에 곧 그 일은 잊어버렸었는데 일 년 후쯤 되돌아보니 그 후 이런저런 일들로 주변 친구들과의 인연이 끊어져 있단 걸 깨닫곤 아, 하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오기 전 딸아이가 사달라던 팔찌를 둘러본다. 띠별로 좋다는 팔찌부터 건강에 좋다는 팔찌, 재물운이 좋다는 팔찌. 한참을 둘러보아도 딸아이에게 맞을 듯한 느낌의 팔찌가 없다. 그러다 근심, 걱정을 없애 준다는 무환주를 보니 아들이 생각나 하나 집어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갑자기 성인이 되니 이런저런 고민이 많이 생긴듯해 보였는데, 이제 성인이니 어떤 길이든, 어떤 결정이든 오롯이 본인이 해야 할 것이므로 내가 해줄 것은 기도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때의 보살님인듯한 분이 오늘의 나를 잡아끌지 않는 건 내가 조금은 둥글어졌나보다 하며 슬몃 웃음 짓는다.

밖을 나와 잠시 고민하다 도솔암으로 향해 있는 길에 접어들었다.

선운사에서 도솔암까지는 2.7킬로미터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선운사를 오는 길도 꽤 길고 넓은 선운사를 돌아보다 보면 사실 도솔암까지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은 잘 생기지 않는다.

도솔천 오른쪽으로는 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된 길이 있고, 왼쪽으로는 서해랑길의 한 부분인 산책로가 펼쳐져 있다. 마땅치 않은 신발에 잠시 고민하다 산책로로 접어든다.

굵은 둥치의 나무들, 바위와 이끼들 그리고 아직은 겨울의 황량해야 마땅할 땅을 푸르게 뒤덮고 있는 꽃무릇의 물결. 선운사 초입 넓게 흐드러진 붉은 꽃도 좋겠지만, 다음엔 숲 사이사이로 어우러져 붉게 필 꽃무릇을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조금 힘들다 싶을 즈음 도솔암이 나왔다. 암자라고 하지만 대웅보전과 나한전, 삼신각, 내원궁까지 있는 규모가 큰 사찰이다. 대웅보전 앞 빼곡히 늘어선 색색의 연등을 지나 올라가니 내원궁으로 가는 길가 마애불상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길고 가파른 돌계단 길을 따라 내원궁으로 오른다. 내원궁에는 보통 마애불상을 모시지만, 이곳은 마애불상이 아래로 내려와 있어 지장보살(고려후기 양식 보물 제280호)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작은 암자 뒤로 저 멀리 두 암벽이 마주 보고 있는 시원한 풍경이 펼쳐지는데 암벽 사이 길을 지나면 극락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내원궁은 기도효험이 좋은 곳이란 설명에 기도를 드릴까 하고 법당을 보니 좁은 법당 안, 많은 분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난 아들이 가진 힘을 믿으니, 내 기도는 더 간절할 이들을 위해 조금 양보하기로 한다.

내려오는 길 앞서 내려가던 부부가 다시 계단을 거슬러와 보왕삼매론이라고 적힌 글을 찍는다.

왠지 이 글귀가 굉장히 위로가 된다는 남편분의 이야기에 예쁜 미소를 짓는 아내. 모습 자체가 세상의 원초적 서글픔에 같은 것에 대한 위로인 듯 느껴진다.

계단을 내려와 마래여래좌상(고려시대, 보물 제1200호) 앞에 섰다.

앞쪽 안내판에 마애불 가슴 쪽에 감실이 있고 그곳에 비결록이 있었다고. 

1820년 전라 감찰사 이서구가 감 실을 열자 갑자기 풍우와 뇌성이 일어 그대로 닫았는데, 책 첫머리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본다’라는 글이 쓰여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비결록은 19세기말 동학의 접주 손화중이 가져갔다고 적혀 있다.

잠시 앉아 불상을 보고 있자니, 바로 옆 시주쌀과 초를 파는 보살님들이 커피를 한 잔 주시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신다.

불상의 머리 위쪽 툭 튀어나온 나무 조각이 보이는데 이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이 있었는데 벼락에 소실되었다, 그리고 불상 외편으론 큰 소나무가 오른편으로 작은 소나무가 있는데 오른편의 고목도 벼락에 소실되어 새로 심은 것이라고.

불상이 새겨진 암벽에 철성분이 많아 벼락이 잘 친다는 부연 설명을 들으니 왠지 마애불 비결서의 설화도 실제에 더 가까워지는 듯하다.

왕복 800미터쯤 되는 용문굴을 다녀올까 잠시 고민하다가 도솔암 가는 길의 꽃무릇과 동운암, 석상암, 참당암 그리고 코로나로 운영 중단 중인 성보박물관과 함께 다음을 기약한다.

도솔암 대웅보전에 이르러 문득 기도하고픈 마음이 들어 절을 올렸다. 가족의 건강, 아이들의 장래, 나의 행복... 무엇을 빌까 잠시 생각하지만 절이 이어질수록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되이게 될 뿐이다.

108배를 마치고 나오니 어느새 3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흘러온 거리가 멀어 이제 다시 거슬러 가야기에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쉬운 오늘의 발걸음을 돌린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 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나와 같이 게으른 중생은 사찰에 가는 길 사찰 홈페이지를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사찰 여행은 좀 더 풍성해진다. 


<선운사 유래_출처 www.seonunsa.org>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兜率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시인ㆍ묵객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전쟁 난민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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