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 2코스
전국을 걷고 싶은 욕구가 생긴 건 아쉽게도 건강이 나빠진 걸 알고 나서였다. 암이다 아니다의 고개를 여러 번 넘었다. 병명을 진단받기 위해 반복적으로 입원을 하고 검사를 하고 수술을 하느라 2여 년을 병원을 들락거리면서 따스한 햇살, 산뜻한 발걸음, 행복한 느낌 그리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순차적으로 발견된 3곳의 5센티가 넘는 혹들은 다행히 암이 아닌 걸로 결론이 났지만 뇌동맥류 수술하는 과정 속에서 생애 첫 유언장을 쓰기도 했었다. 죽음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행복하게 살지 못했던 후회의 마음이 조금 더 컸다. 좀 더 즐기는 삶을 살았더라면...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까? 중환자실의 이틀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후부터 어떻게 하면 '나답게 즐기는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누구에 삶에도 한 권에 소설이 되지 않을 만큼 사연이 없는 삶은 없겠지만 세상에 내던져진 것처럼 고단하지만 꿋꿋하게 살아낸 나는 마음 깊은 곳에 희석되지 않은 억울함이 있다.
'삶은 억울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남은 삶은 조금은 더 나를 위해 살고 싶었다.
늘 어디론가 떠나는 삶을 꿈꿨다. 현실의 무게로 다른 삶들처럼 철철이 해외여행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지금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은 '걸으며 나와 대화하는 삶'이다. 나는 나와 친해지고 싶다. 남들이 보기에는 혼자일 수 있으나 나는 늘 나와 함께였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다정하고 푸근한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질책과 비난으로 더 노력하는 삶을 살아내게 했다. 타인을 만족시키는 건 쉬웠지만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런 나와 우리나라 전역을 틈틈이 두 발로 꾹꾹 눌러 밟으며 걸어보기로 했다. 내 안에 날이 서있는 나와 함께 걸으며 생각하고 마음을 나누기로 했다.
늘 자신감 넘쳐 보이는데 혹시 두려운 게 있냐는 질문을 30대에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죽는 날까지 내가 누군지 모르고 죽을까 봐 두렵습니다"라고 답 했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지금은 나를 조금 더 알게 되었을까? 스스로에게 조금 너그러워진 나를 발견했지만 스스로와 친해지지 못한 나를 데리고 다시 여행을 나선다.
이번에 트레킹 한 남파랑 코스는 부산의 도심을 걷는 시간이 꽤나 길었다. 도심과 도심을 가로지른 부산교를 지나 3시간가량을 걷고서야 해안가를 만났다. 지도를 보니 반은 도심을 또 반은 해안가를 걸었다는 걸 알았다.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밖에서 보이는 나에 궤적처럼 인생의 궤적이 어떻게 남을지 궁금한 마음으로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데리고 걷고 걷는다. 중간중간 형편없는 글솜씨에 스스로에게 실망하면서 쓰는 일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자만 궤적을 남겨보자. 나선 길은 걸어보자.
남파랑 표식은 시원스럽다 지친 발걸음의 노고를 위로해 줄 만큼
남쪽은 봄소식이 빨랐다. 마음이 따사로워졌다.
붉은 등대는 계절 감각이 사라질 만큼 강열해 멍허니 한참을 바라보다 부족함이 없다 여겼다. 늘 부족한 것 같아 스스로를 질책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어떻게 보면 이대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일 수 있겠다 싶었다.
반짝이는 윤슬은 언제나 따갑게 느껴질 만큼 강열하고 눈물겹다.
오늘도 길 위에서 나를 만나 나와 함께 걸었다.
부산 남파랑길 2코스 / 22.17km ・난이도 / 보통 ・소요시간 / 4시간 30분 ・걸음수 / 28.212
_시점 : 부산역부근 (부산 동구 중앙대로 210)
부산지하철 1호선 부산역
_종점 : 영도대교 입구(부산 중구 태종로 8)
지하철 남포역 하차 후 도보 이동
_편히 걸을 수 있는 길이며 주변에 편의시설이 많아 부담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