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만 주세요, 포스터

자급자족 디자인 노트 05

by 유정
맡겨만 주세요, 포스터

부제: 일을 얻는 백한 가지 방법



좋아하는 일이 단지 취미로 남지 않길 바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고민이 있다. 일을 어디서 구하나.


처음으로 내가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하고 싶다고 마음먹던 때에 나에겐 ‘당장 어디서 디자인을 시작하지?’라는 고민이 컸다. 디자인 툴을 배운다. 그럼 디자인을 다 배운 건가? 혼자 꼼지락꼼지락 만들어본다. 실력이 느는지, 무슨 소용이 있는 건지 회의감이 들어 내려놓는다. 혼자 하는 작업의 동기부여에는 한계가 있다.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일을 구하고 싶었지만, 당연히, 너무나도 당연히, 초심자인 나에게는 그만한 실력과 포트폴리오가 없었다. 그럼 실력과 포트폴리오는 대체 어디서 쌓나? 디자인을 전공하지조차 않은 내가.




다행히도, 디자인이 필요한 곳은 생각보다 많다. “포스터 좀 만들어줘” “나 로고 하나만 해줘” “우리 홈페이지가...” “리플렛이...” 이러한 무수한 디자인 작업에 대한 부탁(수주도 아닌)들은 디자이너를 괴롭히는 말-이라는 짤로도 심심찮게 돌아다닌다.


디자인은 사실 모든 곳에 있다. 모든 일에는 디자인 작업이 필요하다. 기획서 한 장에도 디자인은 있다. 의식하지 못할 뿐. 시골 동네 아저씨의 담뱃가게 간판도 디자인이다. 초등학생이 그려온 그림일기 한쪽도 디자인이다. 전문적이지 않은 디자인이지만, 디자인은 디자인이다.


디자인이 여기저기 필요하기 때문에, 비전문적 아마추어인 나도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양손에 들고 어디 디자인 필요한 데 없으세요? 하고 기웃거릴 수 있었다. 필요한 데가 많았다. 대학에 들어가니 동아리에서부터 과 행사까지, 일단 포스터 필요한 일이 정말 많았다.



01 첫 번째 포스터


대학교 학과 학생회 포스터를 가장 먼저 만들었다. 다만, 대학교 1학년 때 과 행사 포스터는 모두 전지에 손으로 그렸다. 대자보 쓰는 바로 그 전지에다가, 12색 마카로. 내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우리 학교가 유독 그런 건지 문과대의 성격인지 아날로그한 방법을 꽤 오래 고수하고 있었다. 이 방법의 장점은 같은 내용을 담아도 모든 포스터가 달랐다는 것이다. 복제가 불가능했단 얘기다. 한 명 한 명 손으로 그리니 개성이 제각각이었다. 주토피아가 유행이라 주토피아 캐릭터를 그려 넣자고 얘기했더니 그림체가 다 달랐다. 귀여운 토끼에서 극사실주의 나무늘보까지.


그러다가 인력이 부족해지고, 그 방법이 재미없어질 때쯤, 모든 포스터가 디지털 작업으로 바뀌었다. 미리 배워둔 포토샵과 일러스트로 꽤 많은 포스터를 디자인할 수 있었다. 큰 행사, 작은 행사, 공연에 MT에 총회에 부원 리크루팅까지 여러 포스터를 제작할 기회가 주어졌다.


대충 만들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모두가 디자인과도, 디자이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 일을 맡아서 가져가면 고마운 심정이었다. 오탈자만 안 나면 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내가 포스터를 어떻게 만들든지 그 아무도 수정사항을 보내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실험하고 디자인하고 내 마음대로 포스터를 만들어 볼 수 있었다.


리쿠르팅 포스터에는 온종일 불 켜진 건물로 환영하는 장면을 그렸다. 신모래 작가가 한창 인기였고, 네온과 반사된 불빛을 표현하는 일러스트가 대세였다. 고 스타일 고대로 따라해봤다. 종강총회 포스터에는 위트를 담아볼까 해서 메로나를 그려보았고 (올 때 메로나), 교수님들과 졸업생들이 참석하는 무거운 행사는 또 그 나름대로 무게 있는 서체를 써보았다. 해보고 싶은 디자인을 해볼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바빠도 불만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 즈음 해서 금손이라는 말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고, 대충 어떻게 디자인을 할 수만 있다면 금손이라는 별칭으로 여기 저기 노동 인력에 동원되었다. 그러면서 팜플렛도, 배너도, 영상도 만들게 되었다. 디자인이 조금씩 더 편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디자인과에 가지 않아도 디자인할 일이 이렇게 많다니.


연말파티 포스터

02 두 번째 포스터


포스터가 꼭 필요하지 않은 일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오랜 친구들과의 정기모임 같은. 이 친구들은 포스터를 보고 오지 않는다. (당연한 얘기다) 단톡방이라는 좋은 시스템에서 오면 온다, 안 오면 안 온다 톡을 날리면 그만이다. 위치나 시간이 헷갈린다면 전화하면 된다.


나에게는 매년 연말파티를 갖는 모임의 친구들이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크리스마스, 연말, 연초 등등 시기와 이름은 바뀌어 왔지만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봤다. 에너지가 넘칠 때는 재미있는 일도 같이 도모(?)하던 모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선물 나누기부터 크리스마스 리스와 트리 만들기, 대본과 소품까지 직접 만들고 연기했던 크라임씬 등등. 이 모임의 정체성은 재능낭비 단체일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무의미한 곳에 온 정성을 다하기 때문에.


포스터를 만든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렇게 된 거 거창하게 한번 포스터도 미리 만들고, 티켓도 준비하자. 오는 멤버는 정해져있지만. (참고로 5명이다) 재미 삼아 포스터를 만들고, 여기저기 붙이면서 하하호호했다. 컨셉도 매 해 다르니까, 그에 맞추어서. 일을 성공시키는 가장 큰 에너지는 놀이에서 나온다나 뭐라나. 어쨌든 이런 데서까지 포스터를 만들어댔으니 디자인 연습은 제법 많이 되었다.



03 세 번째 포스터

개인 작업도 한다. 딱히 다른 게시의 목적이 없는 포스터를 만든다. 영화 포스터 리디자인이 가장 시도하기 좋은 방식의 개인 작업이었다. 일러의 벡터 형식으로만 작업해 내가 최근에 보았던 영화의 포스터를 리디자인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요소들을 가지고 내가 느낀 영화 분위기를 최대한 표현해내려고 노력했다. 작업을 하다보면 이전에 보았던 감각 있는 해외 레퍼런스에 비해 내 작업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사실은 매번 내 시각적 구현 능력에 대한 회의감이 들곤 한다. 그래도 만들고 나서 요리조리 열심히 뜯어보다 보면 또 썩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한 달 전에 만든 것보다 오늘 만든 게 낫고, 한 달 후에는 또 조금 더 낫다. 그런 작은 뿌듯함으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게 내 자식은 예뻐 보인다는 그 고슴도치 엄마의 마음인가.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 한다는 태도였다. 실력에 대한 문제는 일단 내버려두어 보자. 디자인에 계속해서 가까워지려 노력하지 않으면 내가 정말 디자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기 쉽다. 디자인이 전공이 아닌 건 차치하고, 디자인이 의무도, 자연스러운 진로도 아닌 상황에서 작업에 손을 놓기 시작하면 점점 멀어진다. 영화 <써니>에서 주인공이 책 사이에서 오래된 그림을 발견하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한땐 나도 디자인이라는 걸 해보고 싶었지, 하고 회상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상황이 온다고 생각하면 공포스러웠다. 디자인에 조금 관심 있다 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냥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똑같이 이야기한다.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능력과 감각을 보장해줄 수 없다. 실질적으로 디자인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걸 (내 실력이 못 되어 할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계속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꿈이란 말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현재성도 현실성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최대한 현재로 끌어오고 싶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고 싶은 일을 금방 놓쳐버릴 것 같다. 꿈이라는 단어에는 유보의 성격이 있다. ‘언젠가는’ 이라는 부사가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 대신에 내가 좋아하는 부사에는 ‘오늘 밤에’, ‘당장 내일’, ‘이번 주 안에’ 등등이 있다. 그런 내 성향 때문에 내 태도는 항상 ‘일단 시작하자’ 식이다. 사실은 하고 싶은 일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과욕이 만들어낸 결과다. 맡겨만 주세요, 라는 태도가 언제나 긍정적인 게 아니라는 점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꿈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썩지 않게 오래오래 보관하려면 일단 내 손을 거쳐 내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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