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력서 디자인

자급자족 디자인 노트 06

by 유정
첫 번째 이력서 디자인



자기소개서, 이력서, 포트폴리오 등등, 입시와 입사에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라고 요구하는 서류들이 참 많다. 일단 당락을 걸고 하는 일이라면 스트레스를 받는 게 당연하지만, 조심스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사실 난 그런 서류들을 좋아한다. (본격적인 취준을 해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도 할 말은 없다. 변태라고 생각해도 또 할 말이 없다.)


내 이야기를 지원한 단체에 맞게 풀어쓰는 것이 재미있다. 면접도 좋아한다. 면접관과의 기싸움도, 다른 면접자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내가 긴장된 상황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것도 좋다.


나를 표현하려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표현의 방식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나의 경우에도 때마다 선택하는 표현의 방식이 여러 가지다. 잘 건진 사진이나 여행 영상을 SNS에 자랑하고, 블로그나 브런치를 쓰는 것도 결국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다. 당락을 떠나 내 능력을 알맞게 편집해서 보여주는 자기소개서도 나를 표현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꽤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얼마 전 광고 관련 단체에 지원을 하면서 자기소개서와 함께 한 장 짜리 이력서를 만들었다. 꼭 필요한 항목은 아니었지만 마침 내 이력을 한 장에 정리해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기본적인 정보에서부터 그동안 했던 크고 작은 활동 이력과 쓸 수 있는 디자인 툴, 언어 능력 등을 보기 좋게 정리해놓은 한 장. 너무 많은 일에 머리를 들이 밀다보면 내 정체성이 헷갈리곤 한다. 그래서 정리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뭘 해온 사람이고, 남들한텐 어떤 사람으로 보일 것인가?



내 첫 이력서 디자인



일단 내 활동 이력부터 정리를 해보았다. 많긴 많은데, 써놓고 보니 중구난방이 아닐 수 없다. 어렸을 때 한 동아리, 대외활동은 미술 쪽, 출판 쪽이 뒤섞여 있고, 콘텐츠에 가까운 활동, 마케팅에 가까운 활동, 뭔지 모르겠는 활동, 입상은 영상 공모전에서 했고, 뜬금없이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입사에 필요한 활동이라면 거의 다 쳐내버려야겠지만 내 나름대로 적을 두고, 의미를 두고 한 활동들이라 이번 이력서에 꼭 넣어보고 싶었다. 어떻게든 연관성을 만들어내 보자.


처음에는 분야에 따라 나누어서 폴더를 만들어볼까 했다.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듯이. 문화 폴더,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한 활동들입니다 / 디자인 폴더,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한 활동들입니다 / 콘텐츠 폴더, 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고 한 활동들입니다. 하지만 폴더 분류가 또 애매하다. 이도 저도 아닌 것도 있고, 카테고리가 겹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트로 지원할 게 아니라 카피로 지원할 건데, 이런 정보가 다 들어가도 되는 걸까? 글을 썼던 활동들을 더 강조해볼까? 하지만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나를 특징짓는 큰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도 소설가도 비평가도 아닌 카피라이터니까, 시각적인 감각과 관심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게 내 확고한 생각이었다.


다시 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이도 저도 아님’을 중구난방으로 보이지도, 거만해 보이지도 않게 할 방법, 다양한 관심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일단 다시 자기소개서로 가보자. 자유양식이다. 첫 항목의 지원동기를 지우고 이렇게 써보았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입니다. 관심사가 많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저는 대학생활 동안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많은 활동에 도전해왔습니다. (중략)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느끼는 일도 꾸준히 오랜 시간을 하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씩 더 나아지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작은 결과물 하나라도 매일, 매주 꾸준히 해나가려고 노력 중입니다.


광고는 좋아하는 일이 많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좋은 게 왜 좋은지 알고, 열심히 좋아해서 남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광고를 만드는 일과 닮아 있다.


좋아하는 게 많고, 그걸 잘하고 싶어서 모두 다 노력했다. 글도, 디자인도, 영상도, 기획도, 브랜딩도, 그렇게 얻게 된 관심과 능력이었다. 다 잘한다고 우쭐거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능력보다는 성향과 성격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한 가지 일만에 몰두할 때보다 많은 일을 한 번에 할 때 더 좋은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금세 질리고, 금세 그만두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부지런했고, 최대한 끈기 있었다.





다시 이력서(표현이 정확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만들려던 한 장 짜리 그것)로 돌아와 보자. 활동 이력은 어쩔 수 없이 나열한다. 따로 분류하면 더 복잡해질 것 같다. 대신 대문짝만하게 이렇게 적어본다. ‘멀티를 꿈꾸는 카피라이터 ooo입니다.’


이 타이틀 하에서 내가 가진 것들을 다시 정리해본다. 작성하기 훨씬 수월해졌다. 하나의 확고한 이미지를 만들고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열식이어도 괜찮다. 이제 핀터레스트에 이력서 디자인을 검색하면 나오는 그런 기본적인 형식에 내 정보를 기입한다. 이름, 연락처, 채널 주소, 학력, 활동 경험, 툴 능력과 언어 능력 등등. 제법 그럴싸한 이력서가 만들어졌다.


적고 보면서 필요한 게 무엇이 더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스페인어 능력을 증명할 만한 어학 성적이 필요할 것이고, 관심 분야에 대한 확실한 수상 경력도 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광고 공모전으로. 목표가 생겼으니 채우면 된다. 도전해야 할 것은 어학시험과 광고 공모전이다. 마침 광고 단체에서는 공모전에 여럿 출품한다. 학교에서는 스페인어 수업을 듣게 된다. 그렇다면 이번에 시작한 일들은 나름의 선택과 집중이 잘 되었다고 평가해볼 수 있겠다.


이력서를 한 장으로 정리해보니 나도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이 한 장이 나를 모두 담을 순 없겠지만 이것도 나의 일부를 보여주는 데는 좋은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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