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을 맞이하는 첫 노래
#취향 #동년배
1월 1일이 됐다. 스물다섯이 되었다.
해마다 1월 1일이 되면 낯선 달력을 펼쳐 놓고 낯선 나이를 마주하게 된다. 고작 1이 더해졌을 뿐인데 2020이라는 숫자는 무슨 SF에 나오는 미래도시 같다. 머릿속에선 누군가 ‘몇 살이에요?’ 물어볼 때 제대로 대답하는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자꾸만 한 살을 까먹을 것 같아서.
신정을 쇠는 우리 집에선 새해 첫날 떡국을 뜨며 나이를 먹는다. 그러나 낯선 나이를 받아들이는 건 떡국 한 그릇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만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20대에는 종종 자신의 나이가 들어간 노래를 통해서 그 어색함을 해결하려고 한다. 21살엔 딘의 ‘21’을, 23살엔 아이유의 ‘스물셋’을, 25살엔 ‘팔레트’를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며 나이와 친해진다. 못 믿겠다면 20대가 있는 카톡 친구 목록을 쭉 내려 보자. 분명 저 노래들이 하나씩은 프로필 뮤직에 걸려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거다.
노래는 나이에 대한 훌륭한 위로다. 비루한 숫자 몇 개를 스웨그 있는 노래로 승화시키면 그 나이에도 왠지 모를 정감이 가는 데에다가, 모두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심란함을 느낀다는 공감대까지 형성할 수 있다.
유행하는 말 중에 <동년배>라는 말이 있다. ‘나 20인데 내 동년배들 다 이거 한다’와 같이 쓰인다. 젊고 어린 나이와 동년배라는 쌍화차 향 나는 어휘 사이의 괴리가 재미있는지 인터넷에서도 현실 대화에서도 자주 쓰인다.
1월 1일이 되면 다 같이 한 살을 먹는 한국식 계산법에서는 <동년배> 정서가 훨씬 쉽다. 그 나이에 좋은 것들, 좋아하는 것들, 추억하는 것들은 쉽게 공유된다. 공유하는 감각 자체를 즐긴다. 너도 어렸을 때 베베 먹어봤지? 달빛천사 보면서 노래 따라 불렀지? 하고 그 나이대만의 취향을 나누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이러한 정서는 어마어마한 모금액을 자랑하는 텀블벅의 달빛천사 펀딩에서 폭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팔레트는 어떤 노래인가! 아이유가 이때 스물다섯이었다는 사실은 “I'm twenty five"라는 후렴구의 가사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사는 사실 "I'm truly fine"이라는 뒤의 가사와 라임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굳이 나이를 이야기한 것은 사실 뒤의 가사를 말하기 위함이지 않을까. 이 사소한 가사는 왜 25살들에게 공감을 사고 있는 걸까.
긴 머리보다
반듯이 자른 단발이 좋아
하긴 그래도
좋은 날 부를 땐 참 예뻤더라
오 왜 그럴까
조금 촌스러운 걸 좋아해
그림보다 빼곡히 채운
Palette, 일기, 잠들었던 시간들
I like it. I'm twenty five
날 미워하는 거 알아
I got this. I'm truly fine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팔레트의 가사는 좋아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나열한다. ‘A보다 B가 좋아’가 반복되는 굉장히 단순한 형태다. ‘긴 머리보다 반듯이 자른 단발이 좋아’ ‘Hot Pink보다 진한 보라색을 더 좋아해’ 등등. ‘좋다’라는 말이 무려 12번 언급된다. (심지어 스무 살 적을 회상하는 노래도 ‘좋은 날’이다)
그러더니 후렴에서는 ‘날 좋아하는 걸 알아’ ‘날 미워하는 걸 알아’ ‘I'm truly fine’으로 비약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나열과 사람들이 날 좋아하고 미워하는 거에 괘념치 않는 것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생각보다 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누군가 오래된 인디 음악과 체크 셔츠와 안경,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있지 않은가. 그 인상은 힙합과 스케이트보드를 좋아하는 사람의 것과도, 연어 아보카도 포케와 요가를 좋아하는 사람의 것과도 다르다.
좋아하는 것들이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조금만 명확하게 하면 “취향”이다. 더 정확히는 좋아하는 것들이 일정한 방향을 가질 때 취향이 된다.
취향 趣向
명사
1. 하고 싶은 마음이나 욕구 따위가 기우는 방향.
취향에는 방향이 있다. 좋아하는 개체들의 단순 나열에서 끝나지 않고, 나열된 것들을 잘 살펴보면 일정한 방향이 존재한다.
그러고 보면 떠오르는 또 다른 노래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나열하는 노래다. 제목부터 My favorite things다.
1965년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는 ‘My favorite things'라는 노래가 나온다. 내 취향을 저격하기도 한 이 노래는 영화에서 메리 포핀스가 천둥소리에 놀란 아이들을 달래고 재우기 위해 부른 것이다. 무섭거나 외롭고 슬플 때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려 보렴!이라는 따뜻하고 순수한 내용을 담고 있다. 몇 부분의 가사를 소개해본다.
Raindrops on roses and whiskers on kittens(장미 위의 빗방울과 아기 고양이 수염)
Bright copper kettles and warm woolen mittens(밝은 구리 주전자와 따뜻한 양털 벙어리장갑)
Brown paper packages tied up with strings(끈으로 묶이고 갈색 종이로 싼 선물)
These are a few of my favorite things(이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몇 가지 것들이야)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겠지만 노래 내내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 파트에 나오는 물건들에서는 따뜻한 갈색과 아이보리색이 떠오른다. 아무 물건이나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가사에 하나의 취향이 담겨 있다.
다음 가사도 일정한 색깔과 방향을 띤다.
Girls in white dresses with blue satin sashes(하얀 드레스와 수놓은 파란 허리띠를 한 소녀들)
Snowflakes that stay on my noes and eyelashes(내 코와 눈썹에 올라간 눈송이들)
Silver white winters that melt into springs(봄으로 녹아가는 하얗고 은빛의 겨울)
These are a few of my favorite things (이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몇 가지 것들이야)
춥고 하얗고 반짝거리는 겨울의 모습을 그리는 것들은 마치 겨울왕국과 엘사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 하얗고 파란, 일정한 색깔을 띠고 있다. 여기서 좋아하는 것들도 취향의 주인에 대해 꽤나 선명한 인상을 남긴다.
취향은 한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아이유의 노래 속에서 취향을 나열한 뒤에는 ‘이제 조금 나를 알 것 같다’는 가사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되짚어 보자. 이전보다 확고해진 취향이 나의 모습, 혹은 나의 자아를 선명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취향을 통해서 나를 말하고, 표현하고 싶어 진다.
확고한 취향과 안정적인 자아는 다시, 사람들과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게 한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이 내버려 둘 수 있는 강한 멘탈이 장착된다.
아이유가 그려내는 스물다섯이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아직 다 컸다고 할 순 없지만 스물셋보단 나에 대해 잘 알겠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 이상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이제 조금 어른이 된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 나에 대한 만족감과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안정감이 스물다섯이라는 별 거 아닌 숫자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제 일을 시작하고, 이제 조금 취향을 찾았으며, 내 주변에 내 사람을 둔 지금의 스물다섯이 무언가 의미심장하고 애정 어리게 느껴진다.
그래서 <팔레트>를 들으면 내가 스물다섯이라는 사실에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 덧붙여
우리는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길 원한다. 그보다 정확한 표현은, 취향이 그려내는 한 사람의 이미지를 내 것으로 소화시키고자 한다. 그 이미지를 강화시키기 위한 아주 좋은 방법은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이다.
한편으로 취향 중심의 관계 형성은 이미 트렌드가 된 지 오래지 않나. 어쩌면 팔레트는 개취, 취향 존중, 취향 공동체 등등의 신조어가 쏟아져 나오는 취향 중심의 시대를 선도하는 음악일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