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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May 16. 2024

004. 게으름과 부지런함 사이에서

내게 필사란 무엇인가

필사 : 베끼어 씀.


매일 필사를 한 지 1년 가까이 되어간다. 작년 4월 17일에 100일 필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매일필사를 도전했었다. 먼저 시작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따라가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했다. 평소에도 이미 책을 읽고 나면 캘리그래피(라고 하지만 손글씨 수준인)를 써왔기 때문에 시작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끈기가 없는 데다 변덕스러웠던 나는 무엇을 하든 진득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책을 좋아한다고는 해도 어릴 때는 명작동화, 학창 시절에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지 같은 장르소설에 빠져 대충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책을 많이 읽곤 했었다. 나의 독서 수준은 독서가라고 할만한 것도 못됐다. 책 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도 많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곳은 책이었다.


본격으로 필사를 하게 된 것은 2014년 즈음이다. 대학생이 되고 난 후에 책을 읽고 나면 좋은 구절을 노트에 끄적이긴 했지만 글씨라는 걸 써보고 싶었다. 그냥 글씨 말고 멋짐이란 게 폭발하는 글씨. 그렇게 캘리그래피라는 것을 알게 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삐뚤빼뚤 작가의 작품들을 따라 써보며 독학을 시작했다. 붓펜으로 시작한 캘리그래피는 만년필로 넘어가고 딥펜까지 손대게 되면서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는데 명필이 아니었던 나는 도구를 열심히 모으는데 더 집중하게 되었다. 각종 도구들로 필사를 이어갔고 독서의 취향이 확고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여행에세이와 소설, 시를 주로 읽었다. 나의 30대는 많은 책 중에서도 시에 홀랑 빠졌던 시절이었다.


시를 필사하고 캘리그래피로 멋을 부려 꾸미고 책을 더 많이 읽게 되면서 글 쓰는 사람, 필사하는 사람, 책 읽는 사람을 많이 알게 되었다. 하리그라피라 이름 붙인 나의 글씨는 어쩐지 멋있어진 것만 같았다.(착각이다. 나는 올챙이였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다. 물론 지금도 올챙이와 다를 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곁을 내어줄 만한 사람은 금방 찾지 못했다.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교성이 떨어지는 나는 친해지기까지 꽤나 오래 걸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려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진짜 필사를 한다고 느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필사라는 단어를 채집하여 매일필사를 하고 있다는 소리로 시작한 나의 필사 이야기는 이제 시작인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서문이 이렇게도 길다.


매일필사 1차 도전은 금세 끝나고 말았다. 100일 필사는 무사히 마치고 나니 버티고 있던 의지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지난해 유난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터라 필사모임마저 탈주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졸업하고 한 일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일을 그만두고 본가로 내려와 산지 일 년째였다. 할 줄 아는 거라곤 하나뿐이었고 갑작스레 사회로 떨어지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고 사람에 상처 입고 사랑에 상처 입으며 절망과 슬픔이 연속으로 쳐들어왔다. 그래서 필사에 매달렸던 것인데 너무 무리했던 탓인지 고꾸라지고 말았으니 역시 나는 끈기 없는 인간임이 분명했다.


황당한 것은 이제부터다. 필사를 그만하고 싶다더니, 끈기 없고 게으르다더니 나는 필사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폭주했다. 이럴 거면 왜 탈주한 거지? 나의 이런 행보가 황당하겠지만 가장 황당한 것은 나였다. 모임에 인증하지 않으니 매일필사는 실패한 것이 맞다. 하지만 모임에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염치없지만 재입장을 했고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2차 도전은 10월 30일에 시작됐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 청소도 빨래도 설거지도 있는 대로 미루는 편이고 숙제를 정말 싫어해서 숙제도 잘하지 않았다. 혼나는 건 너무 싫었지만 그걸 이겨내는 게으름이었다. 완벽하게 하지 못할 바엔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오래 하며 살았다. 그 기저에는 나를 믿지 못하고 미워했던 지난날이 있다.(잊지 않고 등장하는 나를 미워하는 나. 이 정도면 나를 예뻐하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


내가 게으르다는 것을 왜 늘어놓느냐면 나는 진짜 게으르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필사를 할 수도, 매일 일기를 쓸 수도(한 번도 끝을 본 적이 없다. 다이어리라는 물건의 끝을.) 매일 글을 쓸 수도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란 말이다.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필사하는 내가 대견해졌다. 199일째 매일 필사를 하는 것도 모자라 매일 글쓰기챌린지까지 시작한 내가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다. 


필사를 하면서 깨달았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시를 좋아해. 나는 문장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만년필로 쓸 때 사각거리는 느낌을 좋아해. 사람들이 내가 쓴 필사를 좋아해 주는 모습을 좋아해. 필사하는 내 모습을 좋아해. 내가 이렇게 부지런했다고?? 끈기 없고 게으른 내가 매일필사를 하고 있다니 이걸 칭찬 안 하면 칭찬이란 말은 사라져야 해!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


이런 낯간지러운 생각들이 마음속에서 마구마구 솟아났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나는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미운 모습, 싫은 모습이 남아있지만 이런 나에게도 예쁜 모습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아주 오랜만에 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나서 필사를 할 때면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마음이 힘들 때면 필사를 하면서 잡생각을 날리기도 했다. 슬플 때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을 만나면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됐다. 필사하기 참 잘했다, 라는 생각이 자주 하게 되었다.


무너지고 휘청대는 나를 살린 문장과 그걸 기록했던 지난날들을 돌아본다. 앞으로 씩씩하고 멋지게 잘 살아갈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여리고 약한 부분이 많으니 말이다. 그래서 힘들고 슬프더라도 나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게 있어서 다행이다. 앞으로 나의 매일필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매일필사를 도 실패하는 날이 오더라도 그때는 나를 미워하지 않을 것 같다. 언제든 다시 시작하면 된다. 


필사는 나의 힘이다. 


글쓰기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2024.05.16.


* 네. 소심한 관종 여기 있습니다. 많은 칭찬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 그 동안 써온 필사를 인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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