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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May 17. 2024

005. 내 귀에 벌레가 살아요

삐------

이명 : 몸 밖에 음원(音源)이 없는데도 잡음이 들리는 병적인 상태. 귓병, 알코올 의존증, 고혈압 따위가 그 원인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내 귀에 벌레가 살게 된 것은.


지금은 하루종일 TV를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화면조정시간이 뜨면 삐- 소리가 나고 TV가 끝이 났다. TV를 끄고 나면 한동안 그 삐-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나는 사람들 모두 그 소리를 듣는 줄 알았다. 소리가 사라지는 새벽의 고요 속에는 언제나 삐벌레가 함께했으니까.


나와 가장 오래 살고 있는 삐벌레가 궁금하지는 않았고 다들 그렇게 벌레 하나쯤 키우며 사는 거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삐벌레는 화면조정시간처럼 삐거리기도 하고 물놀이를 하고 나서 귀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웅웅 거리기도 했으며 어떤 날은 윙윙 날아다니기도 했다. 특히 혼자 있는 새벽에는 자주 있는 일이라 소음 속에 살다 보니 침묵의 시간이 신나나보다, 그래서 더 잘 들리나 보다 했다.


삐벌레가 이명이라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았다. 이명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왜 그러는지는 알지 못했다. 건강검진에서도 특별한 이상소견은 없었다. 정밀검진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평생을 이렇게 살아오니 크게 불편하지 않아서 삐벌레는 내 귀에서 방을 빼지 않아도 됐다.


2020년 코로나여파로 인해 일이 무척 힘들었다. 그때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거리두기와 개학연기, 2인이상 모임 금지 등으로 사교육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교육비를 환불하고 팀수업은 개별수업으로 변경되었으며 학원은 고요해졌다. 말을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수업인 데다 영수와 같이 중요한 과목은 아니었기에 더 타격이 컸다. 이런 와중에도 원생모집은 멈출 수 없다는 현실은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나는 학원강사이자 학원관리를 도맡아서 하는 팀장직책을 맡고 있어서 갈수록 스트레스는 더 커졌다. 가장 큰 스트레스를 유발한 것은 한 선생님이었다. 경력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나이는 나보다 한참 많았던 그 선생은 수업 외에는 협조적이지 않았고 불만이 많은 선생이었다. 학생뿐만 아니라 선생도 귀한 상황이라 불화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반복적인 클레임은 나의 이성의 끈을 싹둑 잘라버렸다. 그렇게 그 선생과 전쟁에 돌입했고 나는 돌아버리고 말았다. 구구절절을 좋아하는 나지만 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지 않다. 어쨌든 나는 그 선생을 꼴도 보기 싫은 나머지 학원에 있는 시간이 무서워졌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났고 삐벌레는 양식을 얻은 양 날뛰었다. 두통을 데려온 삐벌레 덕에 나는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7년 가까이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공간이 주는 압박과 사람으로 인한 두려움은 그곳을 떠나자 사라졌다. 삐벌레도 잠잠해졌다. 그 후로는 꽃을 보러 다니고 숲 속을 산책하고 바다를 보러 다녔다. 걷고 걷는 사이에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삐벌레가 날뛰었다. 삐벌레 덕분에 소음에 민감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시끄러운 노래를 듣지 못하고 사람이 많은 공간이나 소리 지르는 사람의 목소리에 취약하다. 그런데 지금 일하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며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행복한 대화도 아니고 사무적인 대화에 항의와 불평, 불만, 억지, 무식한 요구가 난무한다.(콜센터 아님) 좋은 목소리도 쉬지 않고 들으면 듣기 싫어지는데 싫은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듣고 있다 보니 다시 삐벌레가 활개를 펼치나 보다.


나는 스트레스에 취약한 내가 너무 한심하다. 그게 뭐 별거라고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좋게 좋게 웃으며 넘어가면 되지 왜 짜증을 내냐고 할까 봐 무서워서 오히려 화를 내고 만다. 어제는 내가 기특했는데 오늘은 한심해하는 나의 극단적인 변화에 내가 다 놀랍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런 나도 나다.

내일은 최근에 읽었던 책의 작가님을 만나러 간다.

기운충전해서 다시 내일을 잘 살아야지.

삐벌레를 달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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