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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Jun 18. 2024

037. 어중간한 인간

자학인지 자만인지?

어중간하다

1. 거의 중간쯤 되는 곳에 있다.

2.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두루뭉술하다.

3. 시간이나 시기가 이러기에도 덜 맞고 저러기에도 덜 맞다.


휴대폰을 보다가 깨달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 SNS란 SNS는 죄다 하고 있네? 무엇을 하더라도 어중간한 나는 이것저것 전부 손댔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스레드, 블로그, 트위터, 브런치까지! 이러니 피곤할 수밖에 없지. 수많은 SNS을 해왔지만 뭐든 어중간했고 정체성이나 스타일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은 그나마 인스타그램뿐이다. 어릴 때 유행했던 싸이월드에서도 나만의 취향과 센스가 드러나는 미니홈피는 만들지 못했다. 깔끔한 게 좋지만 귀여운 것도 좋고, 화이트앤블랙은 너무 심플하잖아? 핑크공주는 아니니까 좀 나른하면서 우아한 분위기를 꿈꿨다. 몽환적인 보라색을 좋아했다. 보라색의 분위기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스타일이 전혀 아니다. 나는 에너지가 넘쳤고 쿨한 신비주의보다는 발랄한 귀여움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다크한 기운이 있어서 장단을 맞추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사람이었다.

(가까이 오면 쏜다!)

잔뜩 곤두서서 의심의 눈초리를 상대를 파악하려던 시절이 있었다. 친해지고 싶지만 친해지려고 다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 상대가 가까이 다가오면 금세 물러나는 사람, 애정과 관심을 원하면서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 한 번 마음을 주면 한없이 달려가 당황스럽게 하는 사람. 이런 나도, 저런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자꾸만 제자리에서 동동거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어중간한 마음은 언제나 실패하는 법이다.


밝음과 우울함 사이, 깨방정과 쌀쌀맞음 사이, 소심한 애교와 지독한 독설 사이, 그 사이에서 나는 방황했다. 나는 따뜻하면서 귀여운 사람이고 싶었다. 나는 냉철하면서 정확한 사람이고 싶었다. '되고 싶은 나'는 늘 기준이 높았고 실제 나와는 괴리감이 커서 자주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만의 스타일, 나만의 기준, 나만의 신념, 나만의 취향을 분명하게 가진 사람을 부러워했다. 꾸준히 한길만 파고 자기만의 취향이 있는 사람들. 자기만의 길을 찾아 당당하게 나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멋있어 보였다.


나는 왜 이렇게 어중한가. 하는 것마다 완전 엉망이고 바닥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중간하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 중에 가장 좋아하고 더 잘하고 싶은 것은 네 가지가 있다.


캘리그라피는 독학으로 시작했고 시작한 지 벌서 10년쯤 됐다. 하지만 잘 쓰는 건 아니다. 애매하게 잘 쓴다. 못 쓴다고 할 수도 잘 쓴다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그러면 전문가에게 배우고 더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는데 적당히 노력하면서 잘하고 싶은 욕심이자 놀부심보라고 해야겠다.


필사를 매일하고 있다. 필사를 하면서 자연스레 다꾸를 같이 하고 있는데 그건 미운 필사글씨를 꾸며서 숨기려는 수작이다. 나는 글씨를 빨리 쓰는 편이고 집중력이 짧아서 오타도 많고 글씨가 자꾸 뭉개진다. 그걸 감추려면 스티커나 마스킹테이프가 필요하다. 반듯반듯 정갈한 글씨를 쓰고 싶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보다 자연이 더 좋은 나는 산책을 좋아하는데 파워워킹은 절대 할 수 없다. 걷다 멈추고 사진을 찍고 걷다 하늘 한 번 보고 걷다 쭈그리고 앉아 길가에 핀 꽃을 보기 때문이다. 좋아한다고 해서 잘 찍는 건 아니니 실력은 늘 어중간하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매일글쓰기챌린지를 시작했다. 매일 쓰다 보면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쓴다. 글은 꾸준히 써왔는데 이제 와서 무슨 핑계인지 모르겠다. 글은 내가 잘 썼다고 생각한다고 잘 쓴 글이 아니고 못 썼다고 생각해도 누군가에겐 괜찮은 글이 되기도 한다. 내가 쓰고도 이건 잘 썼다며 뿌듯해하던 글은 아무런 반응이 없고 가볍게 썼던 어떤 글에는 좋다는 반응이 나오면 정말 난감하고 당황스럽다. 차라리 비난이나 악평을 받았다면 진작에 포기했을까.


어중간한 나에 대해 쓰다 보니 알겠다. 나는 좋아하는 걸 더 잘하고 싶어서 어중간한 것이다. 좋아하면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하면 되는데 더 잘하고 싶으니 기대치가 올라간다. 기대치가 올라가는 만큼 인정받고 싶어진다. 그래서 어중간한 나를 감추고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나의 마음속에 이 정도면 잘하지 않나?라는 뻔뻔한 자만도 있는가 보다. 그러니 바닥이라 생각 안 하고 어중간하게 어느 지점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은근히 돌려까듯이 은근히 나를 내세우고 있었나 보다.


이도저도 아닌 애매하고 어중간한 나는 그저 실패가 두려운 소심한 인간이었다. 뭐 어쩌겠나. 어중간하면 어중간한 대로 나를 끌고 가야지. 가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해 있겠지. 너무 똑부러지고 완벽한 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어중간하게 걸쳐서 주저앉았다가 신나서 달렸다가 못난 글도 쓰고 조금은 마음에 드는 글도 쓰고 때론 멋진 글도 쓰는 어중간한 나도 괜찮다. 자학과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과 꾸준함으로 해보자.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좋아하는 것들이 싫어지지 않도록.



(뭐? 자기합리화하지 말라고? 가까이 오면 쏜다고 한 거 잊었니? 조용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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