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어린 시절이었다. 시골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길, 그 길에 비가 많이도 내렸었다. 비를 맞으며 가던 그 시간이 쓸쓸하면서 좋았다. 손에 쥐고 있던 약과를 품에 안고 달렸다. 왜 혼자였는지, 왜 걸어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온몸이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달리던 그날에 내가 비를 사랑하게 된 걸까? 비가 온다. 집 앞 마루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았던 어느 날 오후였다. 갑자기 저 멀리 산에서부터 밀려오는 비가 보였다. 아, 비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게 아니구나? 비가 멀리서 내리며 다가오는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비는 천천히
다가오는 듯하더니 빠르게 집 앞에 도착했다. 이제 온 세상이 비로 가득 찼다. 비가 내게로 오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어린 시절 비를 맞고 달리던 그때가 아니라 이 순간이었다. 비가 내게로 와 나를 안아주듯 온 세상을 적시던 그날이 내가 비를 사랑하게 된 날이다.
비가 온다. 내 마음에 계속 비가 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비가 오면 우두커니 밖을 바라보는 순간이 많았다. 평소대로 웃고 떠들고 장난치던 시끄러운 내가 아니라 빗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적막 속에 우울한 내가 있다. 나는 나로 사는 것이 슬프고 힘들고 어려워서 비가 내리면 어두워지고 조용해지는 그 순간에 빠져있었다. 고요한 우울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날의 별 볼일 없는 허세일지도 모르겠다.
비가 온다. 다시 비가 그친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 순간도, 비가 내리는 순간도, 비가 그치고 난 직후도 좋다. 비가 내리면 센티해지는 나도 좋고 비가 내리면 묘하게 흥분되고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 나도 좋다. 비가 그치면 세상은 다시 일상의 활력을 되찾는다. 그전에 잠시 선명해지는 순간이 있다. 온 세상이 자기만의 색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깨끗해진다.
내가 비를 좋아하는 것은 흐리멍덩하고 밋밋한 내 일상이 조금은 선명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를 대지 않더라도 그냥 비가 오는 날을 사랑하고 있다. 비가 온다. 이쯤에서 너도 왔으면 좋겠다.* 비가 오는 날에 너에게 비가 온다고 전화를 하고 같이 비를 맞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날이 된다.
눈이 온다. 눈이 많이 오던 동네에 살았다. 겨울에는 늘 눈이 왔고 눈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눈을 많이 보고 자랐다. 겨울이 되면 자기만의 색을 잃어버리는 풍경이 쓸쓸해 보였다. 초록의 이파리도, 붉고 노란 단풍도 사라진 채 가지만 남은 나무들과 모든 게 사라진 논과 밭, 그리고 앙상한 가로수까지. 겨울은 색을 잃어 쓸쓸한 세상이었다. 무채색으로 가득한 세상에는 깊은 어둠과 고요한 풍경이 전부였다. 그러다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비처럼 내리는 싸락눈이 아니라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내리면 추운데 따뜻해지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세상이 전부 하얀 눈으로 덮이면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얗게 변하는 그 풍경을 사랑했다.
눈이 온다. 잘 지내냐고 외치던 그녀가 있었던 곳에 갔다. 그 어떤 곳보다 눈이 많았던, 눈에 파묻힐 것만 같았던 곳으로 갔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눈 쌓인 마을을 지나는 동안에도 바다가 보였다. 눈과 바다, 조용한 시골마을, 그게 바로 겨울이 되면 내가 사랑하는 풍경이다. 덜컹거리는 기차소리와 역에 정차하는 소리,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 저 멀리 바닷가에서 파도치는 소리가 들린다. 목적지가 아닌데 내리고 싶어 진다. 바람이 불어도, 눈이 내려도 바닷가를 걸으며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어 진다. 너를 만나러 가는 내 발자국 위로 내 머리 위로 펑펑 눈이 내린다. 펑펑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