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덤벙거렸다. 물건을 자주 잃어버렸고 자주 떨어뜨렸으며 성격이 급했다. 어린이는 늘 그렇듯 참을성이 없었고 호기심이 많아 쓸데없이 말이 많았다. 어른들의 행동이나 말, 태도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함부로 떠들어댔다. 어린이의 단골대사인 왜?를 남발하고 다녔다. 자주 혼났고 미움받는 게 일상이었다. 엄마는 예민한 데다 엄격했고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나의 덤벙거림과 쓸데없는 질문과 행동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방지축 날뛰는 딸을 품어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눈치가 빨랐지만 눈치가 없었고 거침없이 나서고 말했지만 금세 겁먹고 주눅 들었다. 혼나는 게 두려워서 잔뜩 눈치를 보다가도 터져 나오는 주둥이를 막지 못했다.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주눅 들어 있는 나로 자랐다. 이런 내가 싫어서 잔뜩 가시를 내세운 고슴도치가 되었다. 나를 혼내거나 지적할까나 늘 곤두서 있었다. 그러면 예쁘고 착한 말을 하고 칭찬받을 행동을 하면 되잖아? 그런데 그게 잘 안 됐다. 사랑받기 위해 애쓰기보다 심술궂고 못된 내가 되는 게 더 편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랑해주지도 않을 거라고 믿었다. 나는 어렸고 어린 마음은 자라지 못했다.
여행을 통해 만나게 된 양언니가 있었다. 자기주장이 확실한 언니들 사이에서 양언니는 참 다정했다. 다른 언니들도 좋은 언니들이었지만 나는 양언니가 좋았다. 양언니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아마 띠동갑을 넘었지?)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언니는 아는 것도 많고 말도 부드럽게 하고 글도 잘 썼다. 심지어 사진도 잘 찍었다. 내가 어떤 실수를 해도(그게 실수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짜증스러운 얼굴이나 혼내는 말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내가 엄마에게 받고 싶었던 포용을 언니에게서 느꼈던 것 같다. 언니 앞에서는 주눅 들지 않았고 눈치 보지 않았다. 철없이 나불대는 내가 밉지 않았을까? 정신 사납고 시끄러운 내가 피곤하지 않았을까? 언니도 사람이니까 분명 거슬리는 모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행동이나 말이 언니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언니도 예민하고 기복이 있는 편이지만 그 감정을 남들에게 표출해서 남들을 피로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니가 한없이 동굴을 파고 들어가는 날도 있었지만 우리는 가까이에 있지 않았고 그런 날들이 나에게까지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나는 언니의 모나지 않은 모습이 좋았고 언니 덕분에 마음에 조금은 말랑말랑해진 것 같았다.
그때 알았다. 누군가의 애정이 담긴 마음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 내가 주눅 들지 않게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 같이 있으면 눈치 보이지 않는 사람.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나에게는 좀 더 강한 확신이 들었을 때 마음을 더 내어줬던 같다. 그러니 주변에 사람이 많을 리가 있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마음이 어지러웠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전에는 좀 더 편했는데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면 더욱 감정에 휩쓸리고 불안하고 무서워졌다. 마음을 내어준다는 것이 두려웠고 평소처럼 대할 수 없었다.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믿지 못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다가가는 것과 다가오는 것이 일치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편안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번 주눅 들면 되돌리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금세 마음을 거둬들였고 사랑을 꽁꽁 숨겨두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단단해지고 싶었다. 주눅 들고 싶지 않았다. 지나가버린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들은 나를 잊었겠지만. 내가 갑옷처럼 장착했던 가시에 상처 입고 떠났던 사람들과 그래놓고 되려 상처받고 울었던 어렸던 나를 떠올린다. 나의 결핍은 누군가가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군들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이 알기까지 오래도 걸렸다.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오롯이 나를 아끼고 기특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나를 보고 싶다. 사랑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