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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Jul 01. 2024

050. 평온한 하루

망각은 산책한다, 안희연

망각 (忘却)

어떤 사실을 잊어버림.


장마가 온다더니 아침부터 뜨거운 햇볕 아래

멱살 잡고

나를 끌고서 간다

인사이동이 결정되는 날

어수선한 분위기 속

기대와 걱정과 불안의 감정들

나와는 상관없는 공기의 흐름

메신저에 보이는

내가 뭘 잘못했을까요?

자기 자신은 안 보이지

때가 되면 주어지는 자리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니


오래도록 끓고 끓어서

힘겹게 오르고 올라서

망각이 찾아와 나와 산책하기를 바라며

전부 휘발되었으면

내게로 쏟아지는 무수한 기억과 감정과 목소리

전부 꼭꼭 씹어서 집어삼킨다

나는 뒤돌아보는 게 아니야

뒤를 보며 걷고 있거든

뒤를 보니까 네가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잖아

뒷모습은 아무것도 모르지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야지

전부 지워야지


장마에 젖은 줄 알았더니

미련이 철철 흘러넘쳐 잠겨버렸나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마음을 어디에 뒀더라?

주섬주섬 뒤적뒤적

한걸음 물러나

바닥에서 나뒹구는

낡은 마음 한 덩이

휘발되지 못한 채

구겨지고 너덜너덜해진


네. 말씀하세요.

감정 없이 말하고

기계처럼 서류를 건네고

터벅터벅 산책을 한다

지금 평온한 거 맞지?




망각을 오르막길을 좋아한다

한 걸음 뒤에서 걸으면

당신의 쏟아지던 뒷모습

발자국까지 집어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끓어요, 휘발되도록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없게


지워줄게요, 전부


잡아먹히며 평온한 하루가 간다

_ 망각은 산책한다, 안희연 [당근밭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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