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첫사랑이 헤어진 엄마라는 고백은
아빠의 첫사랑이 엄마라는 고백은. 그래, 그럴싸하다. 어쩌면 가정의 평안과 가장 가까운 평범하고 평화로운 답안. 하지만 나는 의아했다. 이혼한 엄마가 아빠의 첫사랑이라니. 아빠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첫사랑, 네 엄마였어" 첫사랑은 이루어졌다가도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도대체 그 얄궂은 놈, 사랑이라는 놈은 어떤 놈일까. 찾아가 따지고 싶었다. "야! 이루어지게 했으면 그냥 좀 냅두지!"
당신의 첫사랑은 누구였나요? 그의 어떤 점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였나요? 첫 연애가 아니라 첫 '사랑'에 대한 질문입니다.
아버지: 첫사랑, 네 엄마였어.
나: 뻥치지 말고.
아버지: 맞아.
나: 맞다고? 첫사랑이 결혼한 사람일 수가 있어?
아버지: 그래.
나: 어떻게 그래?
아버지: 여자는 원래 진지하게 사귀지도 않았어, 뭘 그래. 그냥 없어서 사귄 거지, 진지하게 사귄 게 없는데 뭘 그래.
나: 여자가 없는데 어떻게 사귀어? 귀신이랑 사귀었어?
아버지: 그니까 여자가 없으니까, 여자가 있고 내가 싫지 않으면 그냥. 그냥 사귀는 거지 뭐. 좋아서 사귀는 게 아니라.
나: 그럼 첫사랑의 어떤 점이 마음을 움직였나요?
아버지: 그냥 순수해서.
나: 순수?
아버지: 순수하고, 내 말이라면 뭐든지 듣고. 나만 좋다고 하니까.
나: 순수한 게 뭔데?
아버지: 착한 거지 뭐. 악한 마음이 없는 거. 세상에 나쁜 물 들지 않고.
나: 나쁜 물은 어떤 건데?
아버지: 그러니까 약아빠지질 않고 그냥 순수한 거지.
아빠와의 인터뷰가 끝나고 몇 달이 지나 다시 들추어 본 인터뷰집. 그동안은 이 글쓰기 프로젝트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나는 사랑 중이었고, 그를 제외한 다른 것들은 모두 눈밖에 있었으므로. 그리고 다시 인터뷰집을 들추다 이 질문을 발견했다. 사랑이 끝난 후에. 아직도 그가 꿈에 나오고, 생각하면 화가 나고, 그러다가도 또 보고 싶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깨닫고 좌절한다. 사랑은 여전하고 관계만 끝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차에 이 질의응답 페이지를 발견하고 화가 났다. 사랑 이 미친놈아! 나쁜 놈아!
아빠와 엄마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후 이혼했다. 나는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 전반은 내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의 화목은 내게 세계 평화였고, 두 사람의 다툼은 내게 우주 폭발이었다. 두 사람에게 은근히 이혼을 종용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이 있었으나, 서른이 넘고 자주 생각했다. 내가 뭘 안다고 그 마음에 의견을 냈던 걸까. 헤어짐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그때는 조금도 몰랐다.
그때의 내게 연애는 쉬웠고, 이별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내게는 첫사랑이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유행가가 사랑을 노래하고, 수많은 영화가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사랑에 노출되어 있지만, 그만큼 사랑을 오해하는 사람도 많을 테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힌트를 주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이거 한 번 들어 봐! 이런 게 사랑일지도?' '이런 사랑은 어때?' 그 힌트를 이용해 저마다의 사랑을 풀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중에는 나처럼 오해하는 사람도 있겠지. 곡 하나를 듣듯, 영화 한 편을 보듯이 뚝딱뚝딱 사랑의 감정을 지어내는 사람. 사랑이 아니면 뭐 어떠냐며 대충 노래를 불러 보는 사람. 그러니 그런 말이 입을 박차고 당당하게 나왔겠지. "차라리 그냥 이혼해"
과거의 내 멱살을 움켜쥐고 흔들고 싶다. 도대체 '이혼'에 '차라리'와 '그냥'이 어떻게 붙을 수 있냐고, 멍청한 게 아무 말이나 뱉으면 다 말인 줄 아냐고 혼내 주고 싶다. 몇 달을 사랑한 사람과의 이별도 일상을 모조리 흔들어 놓는데, 몇십 년을 아이까지 낳고 산 사람들에게 내가 뭘 안다고. 이제야 어렴풋이 이별의 무게를 체감하며 화가 났다. 과거의 나 자신에게. 늘 이별을 세트로 달고 다니는 사랑이란 놈에게. 아직도 그놈을 놓지 못하는 현재의 나 자신에게.
동시에,
당신의 첫사랑은 헤어진 아내였다고 말할 수 있는 지금의 아빠가 몹시도 부러웠다. 내가 했던 건 사랑이 아닐 거라고 몽땅 부정하고 싶은 지금의 내게, 아빠는 마치, 사랑의 모든 관문을 통과한 후 은메달을 목에 건 사람처럼 빛나 보였다. 그는 지쳐 보이지도 않고 미소 짓고 있지도 않다. 800km의 순례길을 묵묵히 걸어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 같다. 그리고 더 걸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아빠의 고백은 위로가 되었다. 어느 날 문득 사랑이 떠올랐을 때, 그저 수면 위로 떠오른 그것을 보며 '맞아, 사랑이었어'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빛나지 않아도 좋으니, 내게도 사람들에게 주고 남은 동메달, 구리 메달이라도 목에 하나 걸리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