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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May 31. 2022

사랑은 자유야

설거지를 하는데 랜덤으로 틀어 놓은 음악이 마음에 안 든다. 그릇들과 춤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음악을 바꾸려고 거실에 왔다가,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쿠키를 본다. 이토록 귀여운 털북숭이 생명체가 나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뭉클하다. 쿠키를 무릎에 앉히고 태블릿으로 음악을 고르다가, 화면에 반사된 우리의 모습을 본다. 유튜브 뮤직을 닫고 카메라를 켠다. 그대로 촬영 버튼을 터치한다. 우리의 한순간이 금세 저장된다. 오래도록 볼 수 있는 사진 한 장으로 남는다. 나는 이것을 사랑으로 정했다.



사진 찍기에는 영 관심이 없는 나의 얼룩 강아지



사진을 찍고 나니 해진 옷이 눈에 들어온다. 해지다 못해 목은 뒤집어져 제자리로 돌아올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 모습이 우스워 이 낡은 옷이 더 좋아진다. 6년도 더 된 옷이다. 내 옷도 아니다. S네 집에 갈 때마다 얇고 가벼워 보여 자주 주워 입었고, 나중에는 아예 내가 챙겨 와 집에서 입었다. 왼쪽 가슴에 있던 프린팅도 거의 지워지거나 떨어져 형체를 짐작할 수도 없다(나는 알지. 우주선이었던 것). 그 시간 동안 구멍 한 번 나지 않고 그저 늘어나고 얇아만지는 이 옷이 기특하기까지 하다. 얇은 만큼 빨리 마르니 더 자주 입을 수 있다. 가진 옷 중 가장 편안한 옷이 되었다.



스리랑카에 있을 때, 나는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낡은 옷이 좋았다. 옷은 낡을수록 얇아졌고, 그런 옷은 옷의 주인과 꼭 하나처럼 보였다. 더운 여름에 저만한 친구가 없겠다 싶었다. 내게도 그런 옷이 하나 있다는 사실에 또 웃음이 난다.



늘어나 목이 뒤집어진 옷. 목에 걸린 앞치마. 음악을 바꾸러 나온 나. 고작 몇 미터 떨어져 있다 마주했을 뿐인데, 열렬히 꼬리를 흔들며 나를 환영하는 강아지. 무릎 위에 올라와 얌전히 안겨 있는 쿠키. 편안해서 자유롭고, 자유로워 편안하다. 때로 무엇에 매혹되는 것을 사랑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낯설고 다르고 단단한 것에 매혹되면 푹 빠져버리니까.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마음 편히 수다를 떨 수도, 길을 걸으며 춤을 출 수도, 커다랗게 노래를 부를 수도, 너의 못난 점은 못났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자유는 없고 갈망만 있다. 현미경으로 보면 보일 것이다. 행복으로 착각하기 쉬운 불안의 조각이.



나는 내가 고르는 음악을 들으며 드라이브하는 걸 좋아한다. 두드러진 취향 없는 S는 내가 뭘 틀어도 별말이 없다. "좋지?" 물으면 "좋네" 답할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 그림 같은 노래를 만들고 풍경을 그리듯이 노래할까? 잔나비는 천재인가 봐" "그러게" 산책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나를 보며 묻는다. "니 신났나?" "응" "왜?" "바람이 많이 불어서 시원해서" 절절한 사연이나 부담스러운 호기심은 없다. 각자의 공간을 존중하고, 서 있는 장소에서 함께 서 있는 상대를 관찰한다. 나는 춤을 멈출 필요도, 시선을 의식하느라 다른 내가 될 필요도 없다. 잠시 후에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묻는다. "니 뭐해?" "그루브를 타고 있지. 나는 지금 사람이 아니라 음표거든" "아, 그래?"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아닌 모습이 되지 않는다. 자유롭다.



내 사랑의 필수 구성 항목은 자유다. 그게 내 사랑 노래의 첫 음이다. 자유롭지 않으면 절대 사랑이 아닌 것이다. 자유롭다고 다 사랑이 아닌 것 또한 S가 알려준 거지만. 하지만 이마저도 S와는 자유롭다. 그러니 우리는 연인이어도 친구여도 선후배여도 이웃이어도 남이어도, 그 무엇이어도 이상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규격봉투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에게는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는 그 누구여도 우리니까.



해지고 낡은 옷을 입은 채 광화문 네 거리에서 만나도 그저 손을 흔들며 서로에게 다가가 말을 걸 것이다. "어디 갔었어?" "서점" "옷이 낡았네" "응. 시원해서 좋아. 돈가스 먹으러 갈까?" "지겨운데" "그럼 팟타이 먹을까" "그러든지" 하고 식당을 찾을 사람들이다. "죄송합니다. 오늘 재료가 다 소진되어서…" 같은 말을 들으면 미련 없이 다른 식당을 찾을 사람들이다. "여기 맛있었어? 맛도 없는데 왜 맛집 같은 소리를 하고 있지?" "일부러 조금만 준비한 거 아니야? 일요일이니까 빨리 집에 가서 쉬려고" 아무 말 대잔치를 하며 맞은편 분식집으로 들어가 음식을 기다리며 유튜브로 타로점을 보다가, 맞지도 않는 해설은 들을 필요도 없다고 꺼 버릴 사람들.



S가 말한다. "나 오늘 또 살쪘다는 소리 들었어" "누가 그래" "전에 같이 일했던 계장님이" "너 같이 커피 먹는 친구들 다 통통이들이지?" "응" "그럼 걔네랑만 다녀. 그럼 덜 뚱뚱해 보일 거야" "얘네 원래는 안 통통했는데" "너도 원래는 안 통통했어" 살이 쪘다는 얘길 들으면 속상한가 보다. 그런 얘길 들으면 어떻게 반응하느냐 물었더니 웃는단다. 그냥 허허 웃으며 그렇다고 한단다. 살이 찌는 게 싫고, 그런 소릴 듣는 것도 싫다는 건 내게 말한다. 내가 S에게 더 무엇이어야 할까. 무엇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서로에게 자유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빚은 없고 은혜도 없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단 하나는, 우리는 쌀 한 톨만큼도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연기할 마음도 없고.



그러니까, 이게 첫 음인 것이다. 무언가 시작하기 위해서 기본으로 있어야 하는,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을 첫 음.



다음 음을 아직 모르는 게 함정이지만,

이걸 안 것만 해도 기특하다고 칭찬해 주고 싶은 오후다.



2016년의 티셔츠와, 2016년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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