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아빠의 위로가 된 그 아기가 바로 나예요

지금까지 자녀와 함께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by 정란

"지금까지 자녀와 함께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그 순간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빠에게 그렇듯, 내게도 아빠와의 추억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공교롭게도 우리 둘의 기억에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순간, 그 배경은 모두 아빠의 화물차 안이다. 내가 대여섯 살 즈음의 어린이일 때, 아빠는 파란색 포터를 몰았다. 아빠는 과일을 기르고 파는 젊은 농부였다. 밭에는 사과가 가장 많았고, 배도 있었다. 복숭아는 사과에 비해 많지 않았고, 과수원 가까이의 할머니 집 근처에는 포도넝쿨이 있었다. 개도 한두 마리 있었고, 닭도 있었다. 밭의 가장 안쪽 끝에는 키가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때가 되면 툭툭 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홍시를 주워 깨끗한 안쪽을 핥아먹었던 일도 떠오른다. 멀지 않은 곳에는 기다랗고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파라솔 같은 은행나무 밑에 돗자리를 깔고, 나처럼 이름이 한 글자인 친구와 함께 엎드려 간식을 먹었던 일도 생각난다.





내가 기억하는 인상적인 장면은 이거다. 아빠와 나는 과수원으로 향하는 포터 안에 나란히 앉아 있다. 나는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작은 키의 꼬마고, 양쪽 다리를 번갈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빠가 알려준 노래. 아빠와 함께 자주 부르던 노래. 동요 '구두 발자국'이다. 선선한 날이었고, 우리는 창문을 열고 달리며 '구두 발자국'을 불렀다. 바람이 부는데도 춥지 않았던 것은 햇살이 차를 따뜻하게 데워 둔 덕분이었다. 미취학 아동이 부르기에는 다소 쓸쓸한 정서가 느껴지는 곡인데, 아빠는 왜 그렇게 그 노래를 불러주었던 걸까.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 길손 드문 산길에 구두 발자국. 겨울 해 다 가도록 혼자 남았네…. 그때의 내가 노랫말을 이해하고 부른 건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지금도 즐겨 부르는 좋아하는 동요이다. 도련님 발자국 옆에 찍힌 바둑이의 발자국이 내 마음을 위로한다. 누군가 함께 걸어준다는 것은 소복이 쌓이는 위로가 되니까.




"나는 니 애기 때. 화물 할 때 사과 싣고 가면서 겨울에, 의자 뒤에 니 태워가지고 가던 때. 그때가 기억에 남지. 서울에 시내 다니면서 잘 자나 보고. 니가 있어 갖고 그게 위안이 많이 됐어. 애기래 가지고. 애긴데. 희망도 있고. 살아갈 희망도 있고"

"아빠랑 나랑 둘이 갔어?"

"너 엄마하고 같이 갔는데 니 뒤에 태워가지고 갔지. 막 눈 오고 힘들 때. 잠 오고 이럴 때"

"그때 기분이 어땠어?"

"가족이 있고 뒤에 애기도 쪼만한 게 있고. 나는 막 불안해갖고 이러고 있는데 니는 편안하게 자고 있고. 그런 걸 보면서 힘을 내고 그래 갔지"


내가 차에서 잠만 자던 아기일 때 아빠의 화물차는 포터보다 훨씬 큰 것이었고, 내게는 아직 동생이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큰 걸 갖고 있었고, 혹은 전혀 가지지 않고 있었다. 스물일고여덟 살 정도의 아빠에게는 트럭만 한 두려움과 더 커다란 희망이 함께 있었던 것 같다. 아기도 무언가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작은 손으로 아빠 마음의 두려움을 떼어내 희망 칸으로 부지런히 옮겼겠지. 그러느라 고단해, 아빠의 불안과는 별개로 엔진의 진동을 느끼며 새근새근 잠들었을 것이다. 그 숨소리가 앞으로 건너가 아빠의 마음을 다독였을 것이다.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누가 누가 새벽길 떠나갔나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 발자국 소복소복

도련님 따라서 새벽길 갔나

길손 드문 산길에 구두 발자국

겨울 해 다 가도록 혼자 남았네




아빠가 '구두 발자국'을 좋아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제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만큼 자란 나를 옆에 앉히고, 나와 함께 그 노래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다. 어느 겨울날의 이른 새벽. 커다랗고 높은 화물차의 운전석에 앉은 아빠. 목적지는 아직 멀고, 하늘에서는 끝없이 눈발이 날린다. 길은 금세 하얗게 뒤덮이고 시야는 막막하다. 트럭이 달리는 모양대로 바퀴 자국이 새겨지고, 또 금세 눈으로 뒤덮인다. 그리고 아빠의 등 뒤에는 바둑이처럼 작은 아기가 새근새근 자고 있다.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내게도 그 동요가 오랫동안 따스한 기억으로 남은 이유. 아빠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그 노래가 떠오르는 이유도 이제야 알겠다. 작은 아기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젊은 아빠의 두려움을 부지런히 떼어주던 용기였다는 것을. 아빠의 희망을 소복소복 쌓아주던 위로였다는 것을. 쓸쓸한 노래가 따뜻했던 것은 바람이나 햇살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함께,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img059.jpg 아빠의 과수원에서 나와 동생